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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안개 막을 뚫고 침투하는 약

블랙커피우유 2018. 1. 13. 11:33

처음에 가벼운 감기기운이 있었던 카트리는 못된 꼼수를 떠올리고 먹으려던 약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카트리는 훗날 회상한다. 그 찬장 문을 닫는 소리는 무언가가 시작되는 소리가 아니었나 하고.

 

안개 막을 뚫고 침투하는 약

 

제럴딘 씨, 저 감기 걸렸어요.”

그걸 왜 나한테 와서 보고를 해?”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면서도 카트리의 안색을 살피는 제럴딘의 모습에 카트리는 남몰래 미소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카트리에게 무른 구석이 있다.

늦은 시각, 약을 먹지 않고 출근한 카트리는 간단한 의뢰를 마친 뒤 스코틀랜드 야드로 향했다. 적어도 카트리에게 있어 오늘의 런던은 커다란 사건사고가 없이 평화로웠다. 물론 그것은 드물게 들어온 의뢰가 적은 카트리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었고, 경찰서 내부는 여전히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구석진 자리에 있는 의자에 힐끗 눈길을 주고,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정문 근처에 위치한 의자에 자리를 잡은 카트리는 그렇게 몇 십 분을 앉아있었다. 카트리의 시선에 참다못한 제럴딘이 빠른 발걸음으로 이쪽에 올 때까지.

멀쩡해 보이는데.”

저 아파요.”

그럼 생글생글 웃지나 말든지. 제럴딘은 인상을 확 구기고 팔짱을 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아픈 사람을 이대로 두실 거예요?”

카트리, 나 지금 바빠.”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나름대로 바빠 보였다. 하지만 제럴딘이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카트리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안 바빠 보이시는데.”

당신은 안 아파보이고.”

죽치고 앉아 기다리기에 무슨 중요한 용건인가 했더니. 급한 일을 해결하고 평소보다 발걸음을 서둘러 탐정의 앞에 섰을 때 그녀가 뱉은 말은 예상했던 말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일하는 중인 거 안보여?”

그래서 기다리고 있잖아요. 부르지도 않고 가만히. 그런데 먼저 다가온 건 제럴딘 씨라구요.”

볼을 부풀리는 그 모습이 천연덕스러워 제럴딘은 머리를 싸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자신이 지나갈 때마다 눈웃음치는 그녀가 신경이 쓰여서 일에 집중이 될 리가 없거늘. 방해된다고 하면 이번에는 밖에서 기다릴 터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차이점은 그녀가 안에 있나 밖에 있나 그뿐.

얌전히 기다려.”

결국 제럴딘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감기에 걸렸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밖에 세워두기도 양심에 걸렸다. 퇴근시간이 오는 게 두려운 날이 있다니. 카트리에일 레이튼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자신이 맡고 있는 그 어떤 사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난해한 일이리라.

대신 일 끝나시면 간병해주셔야 해요~”

카트리에게서 등을 돌린 제럴딘에게 날아온 말은 그녀의 발을 멈추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이쯤 되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포도 맛 젤리가 먹고 싶어요.”

도저히 환자로는 보이지 않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카트리가 그렇게 말했을 때, 둘은 마침 마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달라는 뜻이었다.

당신 돈으로 사먹어. 안 말리니까.”

환자에게 병문안 가는데 빈손으로 가시게요?”

당신은 여기 있는데 무슨 상관이야?”

깍지 낀 손을 앞으로 늘려 가볍게 스트레칭하면서 제럴딘의 말까지 같이 밀어버린 것인지, 카트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아님 블루베리 맛도 좋고요.”

맛 문제가 아니야.”

제럴딘 씨, 정말 안돼요?”

옷깃을 당기며 눈썹을 내리는 카트리의 모습에 제럴딘의 미간에 주름이 일었다. 왜 안하던 짓을. 정말로 어디 아픈가? 제럴딘은 살짝 달아오른 귀를 숨기듯이 안경을 올렸다.

하나만 골라.”

마지못해하는 제럴딘을 끌고 마트 안으로 들어선 카트리는 제럴딘의 말이 무색하게 두 개의 젤리를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제가 사드릴 테니 제럴딘 씨도 드세요.”

그런 거면 그냥 당신 것만 당신이 사면 되잖아.”

제럴딘을 생각하는 기특한 마음에 감동받을 정도로 제럴딘은 손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사달라고 조르더니 당신도 돈이 있었잖아.

그럼 맛을 하나밖에 못 고르잖아요.”

왜 그걸 나눠먹는 전제로 사는 거지?”

그쪽이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어서 좋잖아요!”

제럴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확실히 카트리가 말한 점과 같은 메리트가 있긴 했지만 반으로 정확히 가를 수 있냐는 문제는 둘째 치고 하나의 젤리를 둘이서 딱 붙어먹는 그림은 불편해보이기 짝이 없다. 애시당초 남과 음식을 나눠먹는 것이 뭐가 그리 좋은 일이라고. 비위생적이기만 한데.

하는 김에 장도 보고 가실래요?”

당신 어디까지 뜯어먹을 셈이야.”

간병해주신다고 해놓고선. 영양식 기대하고 있어요, 제럴딘 씨.”

당신이 생각하는 간병은 왜 죄다 먹을 걸로 이어져있어?”

아플 땐 먹는 게 최고에요.”

언제 어느 때나 식욕이 넘쳐나는 카트리다운 말이었다.

정말로 아픈 사람은 못 먹어.”

위가 받아들이지 못하거든. 하긴 당신이라면 앓아누워도 철근도 씹어 먹을 것 같지만. 명백하게 비웃는 어조로 말하는 제럴딘의 옆에서 젤리를 까먹던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철근이라도 맛있다면 먹을 거라고 했던가.

카트리의 뇌리 속에 제럴딘과 아웅다웅하며 즐겁게 대화하던 어젯날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그날 밤, 제럴딘은 카트리의 성화에 못 이겨 자신의 집에 카트리를 들여보냈다. 제럴딘의 침대를 차지한 카트리에게 말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이것저것 가져다주며 챙겨주는 모습에 카트리는 내심 매일 아프면 좋을 텐데, 하고 바라긴 했다. 바라긴 했는데.

카트리는 할 수 있다면 그 생각만은 그만 두는 게 좋다고 어제의 자신을 말리고 싶었다. 무슨 의도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안다. 가벼운 감기를 계속 앓으며, 제럴딘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을 수 있는 데까지 받고 싶다는 뜻이었지. 하지만 세상은 그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

제럴딘 씨, 저라면 철근도 씹어 먹을 거라 하셨죠. 제 몸이 천근만근인 걸요. 맞아요. 철근보다도 무거운데 그게 대수겠어요?

시답잖은 농담이 밖으로 나갈 출구를 찾지 못하고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저편으로 사라졌다. 들어줄 사람이 자고 있는데다가 지금은 한마디를 하기에도 벅찼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카트리는 옆에서 곤히 잠든 제럴딘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이불 밖을 나왔다. 벽을 간간히 짚으며 비틀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고 고스란히 개어둔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었을 때, 목 안쪽에서 간질거리는 통증이 올라와 몸을 둥글게 말고 입을 틀어막았다.

콜록.”

비집고 나오는 기침을 어떻게든 억제하려고 했으나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다행히도 제럴딘의 잠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코트를 껴입는 손이 이유 없이 떨려온다.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카트리는 기상하고 나서 속으로 몇 번은 내쉬었을 한숨을 입으로 뱉어냈다. 그리고는 들이키고, 다시 조심스레 내보내고. 그러자 조금은 속이 편해졌다. 속은 편해졌으나 동시에 현실이 들이닥쳤다. 숨을 쉬는 동작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떨리는 건 손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숨결, 다리, 말하자면 온몸이다.

, ──.”

카트리는 시험 삼아 목소리를 내보았다. 불행 중 다행인지 목소리는 평상시대로다. 아까 전의 느낌으로 봐서는 감기가 더 악화된다면 목도 무사하지는 못하겠지만.

신중한 움직임은 비단 자고 있는 제럴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몸이 말이 아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발이 엉켜 넘어지지는 않을까, 손을 헛짚어 그대로 머리를 어딘가에 박아버리지는 않을까, 숨을 헐떡이다가 호흡곤란이 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이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서 쓰러지는 거 아냐?

눈앞이 아른거리는 것이 꼭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자신의 시야를 방해하는 요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인지, 눈가를 촉촉하게 적신 눈물인지조차 판단이 서질 않는다. 쇳덩이를 달군 듯이 뜨거운 몸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무튼, 컨디션이, 최악이야.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오르고 눈물도 차오르고. 카트리의 입에서 한숨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천벌 받는 걸지도.”

그닥 아프지도 않았으면서 제럴딘 씨의 호의를 이용해 먹었으니까. 지금은 무지하게 아프지만.

감기에 걸린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카트리는 자신이 감기에 걸렸다는 것을 처음으로 정확히 인식한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이전에도 몸이 아픈 적은 있었겠지만 카트리 자신이 괴롭다고, 난 지금 아픈 거라고 제대로 알고 아팠던 제일 처음의 기억.

그때 곁에는 아빠와 오빠가 있었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자신의 바로 옆에서 손을 꼬옥 잡고 있던 아빠와 멀찍이 떨어져서 가만히 지켜보던 오빠를 기억한다. 괜찮아질 거라고 다독여주던 손길과 이런 것쯤은 큰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눈길을 받으며, 깊이 안심했던 날.

병은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혼자 있는 게 싫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카트리는 가족이 흩어져 살게 된 이후 몸 관리를 철저히 했다. 자신이 아플 때마다 응석을 받아주던 가족을 기억하기에. 그들을 그리워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안개를 만들어낼 것을 알아서.

이번에 제럴딘을 찾아온 것은 어릴 적의 버릇을 차마 다 버리지 못한 카트리의 실수였다. 갈 곳 없는 외로움을 혼자서도 잘 달래 왔을 터인데, 무의식중에 사람의 온기를 바랬다.

어차피 가벼운 감기니까. 다음날이 되면 말끔하게 나을 거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어쩌면 그런 달콤한 사고방식 자체가 오늘 일을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심한 감기의 전조를 보이고 있었던 거다. 카트리에일 레이튼은 옛날부터 몸이 아프면 응석받이가 되니까.

그래도 독립한 후로는 가벼운 감기라고 얕보는 일 따위 없었는데. 기댈 상대가 있다고 헤이해진 걸까.

항상 정해진 위치에 놔두는 제럴딘의 안경을 평소보다 조금 먼 위치에 옮겨놓고, 그녀가 숨겨둔 예비용 열쇠를 챙겨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와 정적이 흐르는 거실을 빠르게 지나갔다. 몸이 휘청거렸지만 쓰러지기 전에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지로 성큼성큼. 그 왜, 발이 빠지기 전에 발을 내딛으면 물 위도 걸을 수 있다지 않는가. 카트리는 푸흐흐 웃고는 바로 정색했다.

인정하는 수밖에 없네. 내가 많이 아프긴 아픈가봐.

당신은 비교적 평소에도 그랬어. 방에서 잠들고 있을 제럴딘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젠 환청까지. , 진짜 심각하네. 카트리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자신의 머리장식을 둘러매고 문고리를 돌렸다.

 

 

카트리. 역시 이쪽에 왔군.”

어라, 어디선가 비슷한 대사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요.”

언젠가 도망치던 날의 기억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은 카트리를 제럴딘이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봤다. 습한 공기가 시큰한 콧잔등을 훑고 지나갔다. 그날도 이렇게 날씨가 흐렸는데. 아니, 아니던가. 흐렸던 건 날씨가 아니라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카트리는 이마를 짚으려던 손으로 난감한 듯이 귀 뒤를 긁었다. 프로파일러의 앞에서는 사소한 행동도 조심해야 했다.

카트리는 제럴딘의 집을 나오자마자 탐정사무소에 출근했다. 출근하자마자 퇴근할 심산으로. 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간 카트리는 재빨리 행동했다. 노아가 오기 전에 자취를 감출 생각이었다. 그는 이상한 데에서 감이 날카로우니까. 삐질삐질 흐르는 땀과 흐트러지는 호흡을 지적해오는 셜로에게 달려와서 그렇다고 어영부영 넘기고, 그에게서 등을 돌려 적당한 용지에 맛집 탐방하러 다녀오겠습니다♥』 라는 문장을 날려 적었다. 그대로 영업팻말을 돌리지 않은 채 사무소를 나왔다. 아침 일찍이라 쌓인 의뢰는 있어도 새로운 의뢰는 없었다. 급한 일은 없으니 남은 건 집에 가서 푹 쉬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제 행동을 예상하신 건가요?”

예상이 아니라 당신의 행동심리를 분석한 결과야.”

자기 집에 돌아갔을 거라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동경로까지 파악되고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시야에 뛰어든 낯익은 모습에 카트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뒷걸음질 쳤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제럴딘의 집에서 귀가한다면 이 골목을 사용할 일은 없다. 제럴딘은 카트리가 탐정사무소를 경유해 집에 올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직장에 간 사람이 자택에 돌아올 것이라고.

제럴딘 씨, 출근 안하셔도 되는 거예요?”

오늘은 비번이야.”

그런 줄 알았다면 더 늦게까지 재우지 않았을 텐데요.

입만 뻐끔거리던 카트리가 머릿속에 지나간 말을 지우고 입을 꾹 닫았다. 제럴딘은 카트리의 생각을 내다보고 카트리의 몸을 염려해서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실제로 어제 그 말을 들었더라면 이 이상으로 호된 꼴을 당했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얼마 없는 휴일에 어쩐 일로……. 데이트 신청이라면 죄송하지만 제가 볼일이 좀 있어서요.”

카트리, 내 안경을 옮겼지.”

카트리의 익살스러운 말에도 제럴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문을 열었다. 갑자기 논점을 파고드는 말에 카트리의 시간이 멈췄다. 안 그래도 숨쉬기 불편한 사람 숨을 이렇게 멈추게 하시면 어떡해요. 그런 불평을 하지도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맥락 없이 핵심을 파고들어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은 경찰관의 심문 테크닉이다. 평상시의 카트리라면 받아치지 못할 것이 아니었다. 윙윙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마른 침만을 삼켰다. 제럴딘의 집을 나가기 전, 혹시나 나가는 도중 그녀가 깰 경우를 대비했던 것이 도리어 발목을 잡았다.

당신이 나간 자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이불을 정리할 여유가 없다. 그것이 얼마나 카트리답지 않은 행동인지 제럴딘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카트리는 빈말로도 정리가 능숙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공과 사에서 교류가 있는 제럴딘이 봤을 때 그건 일할 때에 한정되는 부분이다. 인정하기는 뭣하지만 그녀는 영국숙녀를 자처하는 만큼 매사에 말끔하고 산뜻한 태도를 보였다.

무엇보다, 당신이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가버리는 건 이상했으니까.”

제럴딘이 잠시 망설이며 이어간 말에 카트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봐도 확연히 이상하니까. 그게 제일 이상하다.

시간을 벌려는 행동, 여유가 없는 증거, 무언가를 숨기려는 태도.”

제럴딘이 하나하나 증거를 들이대며 카트리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나열하면 나열할수록 무게를 더해가는 말이 점점 카트리를 짓눌러왔다. 째릿 노려보는 매서운 눈빛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낀 카트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실상은 몸이 자신의 한계를 알리는 것뿐이었지만 타이밍이 심하게 좋았다.

마치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그녀는 가장 두려운 적이자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다. 그녀를 마주하는 범인들이 이런 기분일까. 저지른 죄와는 별개로 너무 무서운 체험이야.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 다리에 힘이 풀려?

모든 걸 종합해봤을 때──

큰일이다. 발에 힘이 안 들어가.

순식간에 시야가 반전됐다. 이제까지 버티고 서있던 게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카트리의 몸과 연결된 가느다란 의식의 끈이 인형의 실을 끊어낸 것처럼 절단되었을 때, 카트리의 몸도 주인을 잃은 인형처럼 휘청거림도 없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수직으로 낙하한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무릎이 갈려나갔다.

투둑, 뒷목에서부터 귀를 타고 무언가가 잡아 뜯기는 소리가 나긴 났는데, 무엇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냥 빗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카트리!”

그녀의 사나운 고함소리가 신호라도 된 것 마냥 곧바로 땅에 곤두박질치려는 카트리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낸 제럴딘이 카트리를 잡아끌어 상반신을 일으켰다. 축 늘어진 몸이 기울어 땅에 내려앉으려는 것을 가까스로 저지하며, 뒤로 젖혀진 목을 손으로 지탱해 올렸다. 반쯤 의식이 날아간 듯한 몽롱한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아찔한 소름이 제럴딘의 등 뒤를 타고 오르는 것과는 반대로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거의 감긴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아 어디도 보고 있지 않았다. 평소의 생기 넘치는 눈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하느작거리며 이파리가 흔들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제럴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병원……. 아니, 집안으로 먼저.”

힘없이 뒤로 넘어가는 몸을 끌어안고 황급히 카트리의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손에 익는 감각에 꺼내 들어보니 자신의 집 열쇠였다. 제럴딘답지 않은 다급한 손길로 코트를 뒤집어 안쪽 주머니를 뒤적이자 그제 서야 그녀의 집 열쇠가 나왔다.

카트리, 일어서.”

제럴딘이 쯧 혀를 차고 카트리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감아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하며 일어났을 때, 차가운 감각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또 무슨 타이밍이야.

제럴딘이 이를 빠득 갈며 소리쳤다.

일어나, 카트리에일 레이튼!”

 

 

언제나 똑같은 시간을 반복한다. 행복했던 그 시절의 모습이 되어서.

꿈속의 카트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카트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던 어린 날의 카트리에일.

영국의 꼬마숙녀는 항상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같은 시간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을 터인데 어느 샌가 사라져버린, 리본이 귀여웠던 원피스.

과거의 자신이 마음에 들어 했던 프릴이 달린 원피스는 그해 아빠가 생일선물로 사준 옷이었다. 거울 앞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고 두 팔을 벌려 치맛단을 끌어올리면 그 모습이 자신이 봐도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옷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그 원피스라 해도 좋았다.

좋아하는 옷, 좋아하는 아빠, 좋아하는 가족.

소중한 나의 기억들.

복잡한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던, 그러나 무력했던 아이.

봐요, 아빠. 나 다시 어려졌어. 아빠가 사준 옷을 입고,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그런데 왜 나를 두고 떠나는 거야? 저는 아빠가 필요해요.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부유하던 카트리는 까마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두 개로 겹쳐지며 울려 퍼지는 것이 극심한 두통의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과거와 현재의 목소리가 뒤섞여있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마지막 한마디만은 자신의 목에서 끓어오르듯이 넘쳐흐른 말이라는 것.

당신의 수수께끼 내용대로라면 내가 당신과 보낸 시간은 뭐가 되는 걸까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을 텐데. 그 안개 낀 꿈처럼 모든 게 거짓이었다고 한다면, 꿈과 현실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요. 만들어졌다는 점은 똑같잖아요?

아니,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거짓말. 거짓인 건 네 말 쪽이야.

혹시 모든 게 허상이었나? 사실이 아니었나? 그래서 다시 어려진 거라면? 내가 겪은 일이 사실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면. 그래서 이 모습으로, 가족과 함께 보내던 그 시간을, 아무도 없이 혼자서.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 , ! 마음대로 없던 일로 만들지 마!

허공에 붕 떠있던 카트리가 점점 좁아지는 경계선을 손과 발로 막아서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저건 카트리가 거쳐 간 생각의 파편이다. 지금의 결론에, 지금의 자신에게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한때의 자신. 과거의 잔해. 악을 쓰며 버티면서도 벗어나지 못했던 나약함.

카트리는 의도적으로 입가를 올리며 씨익 웃어보였다. 실체가 없을지라도 내가 웃는 걸 네가 모를 리가 없고 내가 웃으면 너도 웃지.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야.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거든.

어느 쪽이 꿈이고 어느 쪽이 현실인지. 중간에 껴있는 카트리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지만 발로 디딘 쪽을 박차고 손으로 짚은 쪽에 힘을 실어 뜀틀을 넘듯이 뛰어넘어 경계선을 벗어났다.

상상을 뛰어넘는다면 꿈도 뛰어넘을 수 있지 않겠어?

여기는 말 그대로 중간지점이다. 카트리는 아직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다. 꿈을 꾸기 직전에 돌입해 있다는 건 현실로 돌아가기에 늦지 않았다는 뜻이다.

런던거리를 달리는 카트리에게 지금의 기억은 없다. 카트리는 자신의 21년 인생이 어린 시절로 초기화되는 점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전부 없었던 일이 되다니. 전부를 잊어버리게 되다니. 그것만은 싫어. 이겨냈던 기억조차 사라져버린다면 손쓸 방도가 없잖아. 카트리가 의식의 끈을 끌어당기며 있는 힘껏 외쳤다.

일어나, 카트리에일 레이튼!

메아리치는 자신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와 겹쳐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흐릿하게 의식을 되찾은 카트리는 폭주하는 기관차마냥 가파른 호흡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방출해내고 있었다. 불규칙적인 호흡과는 달리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인 행위였다. 속에서부터 열기를 빼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폭발해버릴 것 같은데, 뜨거운 숨을 토해내고 토해내도 석탄을 주입하는 것처럼 호흡은 빨라지기만 했다. 곧이어 추가주문이라도 온 건지 어지럼증까지 동반되었다. 낮게 신음소리를 흘린 카트리가 이를 꽉 깨물었다. 의식을 잠깐 놓은 사이 어지간히도 악화된 모양이었다. 이런 때지만 카트리의 머릿속은 냉정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뭐든지 급정지는 위험하잖아. 자신을 어르고 달래며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가슴을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숨을 골랐다. 거친 호흡을 조금씩 진정시키며 세웠던 허리를 침대에 가라앉혔다.

하아…….”

급한 불을 끄고 무의식적으로 찡그리고 있던 인상을 펴자 옅게 뜨인 눈으로 희미하게 빛이 들어왔다. 익숙한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으니 자신의 몸을 기어 다니는 미지근한 감촉이 느껴졌다. 물을 적신 타월이다. 카트리의 변화를 눈치 챈 제럴딘이 손을 멈추고 물어왔다.

정신이 좀 들어?”

제럴딘 씨…….”

성대를 으깬 듯이 끊어지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고 한 박자 늦게 그게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은 카트리는 꽤나 암울해졌다. 쉰 목소리가 너무 한심하고 볼품없이 들렸기 때문이다.

카트리는 찬찬히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했다. 자신의 집, 자신의 침대. 그리고 누워있는 자신과 소매 끝을 접어올린 그녀.

정신을 잃은 자신을 제럴딘이 돌봐줬다는 것은 일목요연했다. 카트리가 정신을 잃은 사이 옷도 갈아입혔는지 카트리는 땀에 젖은 코트 대신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하는 카트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눈을 움직이던 제럴딘이 겸연쩍은 듯이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지만 멋대로 당신 옷장을 열었어. 그 이전에 집에도 멋대로 들어왔지만.”

이런 때인걸요. 고마워요, 제럴딘 씨. 덕분에 살았어요.”

들춰진 파자마를 내리고 한숨을 푹 내쉰 제럴딘이 카트리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렇게 몸이 안 좋으면 말을 해. 어제는 별것도 아니면서 치대더니.”

그땐 별게 아니라서 말할 수 있었던 거구요.”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험악해질 대로 험악해진 제럴딘의 눈빛이 카트리를 꿰뚫고 있었다.

정작 중요한 때에는 나한테 안 기댄다 이거야?”

……많이 아프지도 않은데 귀찮게 한 걸 화내실 줄 알았는데 그건 괜찮은 거예요?”

당신이 귀찮은 건 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니까.”

우와 너무하시다~”

키득키득 웃는 카트리에게서 평상시만큼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리하고 있다는 것이 훤히 내다보였지만 지금으로서는 무리해서 웃을 기운이라도 있어 보여 다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999를 불러야 하나 했어.”

저 구급차에 실려 갈 정도로 위험했어요?”

당신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갔었어. 의식을 잃은 시점에서 충분히 위험하잖아. 당신이 쓰러졌을 때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당신을 이고 가까운 병원에 갔겠지.”

제럴딘의 말에 카트리는 자신이 생각보다 오래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 누워있는 신세였지만 어찌됐건 멀쩡하게 말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었으니까. 그동안 제럴딘이 카트리를 성심성의껏 보살폈다는 뜻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제럴딘은 카트리의 말을 듣고 아까 전까지의 상황을 되돌아보고 있는 건지 어딘가 먼눈을 하고 있었다. 카트리는 몸이 호전 되는대로 그녀에게 답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우울한 생각에 빠져있는 그녀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구급차를 타보는 것도 귀중한 경험인데요. 좀 아쉽네요.”

그게 궁금해? 어차피 탔어도 탔는지도 몰랐을 걸.”

당신은 몸이 아파도 입은 그대로라 열 받아. 그렇게 중얼거린 제럴딘이 물을 한가득 담은 대야를 안아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비약은 어디 있어?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저쪽 찬장에요.”

스프라도 끓여올게. 그 전에, 당신 지금 힘들어 보이니까 약부터 먹어.”

빈속에요?”

카트리의 어김없는 말에 제럴딘이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당신은 철근도 씹어 먹겠어.

대야를 들고 사라진 제럴딘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약과 컵을 들고 나타났다. 정확히는, 껍데기를 까지 않은 포도 맛 젤리 위에 올린 약과 물이든 컵을.

부족해도 참아. 블루베리 맛은 스프를 다 먹으면 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집 앞에서 마주한 제럴딘의 정장 주머니가 유난히도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제럴딘이 언제 눈을 떴는지는 몰라도 카트리가 탐정사무소에 머문 시간을 생각해봤을 때 그녀가 다른 곳에 들를 시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면 물건을 하나 잽싸게 사는 정도.

후후.”

제럴딘은 히죽거리는 카트리를 못 본체하며 서랍 위에 들고 온 것들을 내려놓고 말없이 뒤돌았다. 아까는 대야를 들고 있었는데, 지금은 빈손이다. 평상시의 그녀. 그런 그녀의 어쩐지 생소한 뒷모습.

──

그 뒷모습을 보는 순간 카트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발하고 있었다.

왜 그래?”

이런, 또 실수를.

아뇨, 냉장고에 재료가 있었나 싶어서요.”

확인해 둔지 오래야.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멀어지는 등을 보고 있자니 속이 매슥거려왔다. 카트리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입을 비틀어 올렸다.

 

 

지금 잠이 들면, 분명 그 꿈을 꾸겠지. 아까는 안 꾸고 어떻게 잘 넘어갔는데.

혼자면 몰라 지금은 집에 제럴딘이 있다. 꿈에 허우적거리며 아빠를 찾는 모습을 남한테 보이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적어도 카트리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녀에게 충분할 정도로 보여 버린 건 그렇다 치고.

꿈속에 드리우는 안개를 비바람이 운 좋게 몰고 가줄 거란 기대는 안 하는 게 좋다. 카트리는 서랍 위에 놓인 약에 손을 뻗었다. 카트리가 알고 있는, 할 수 있는, 안개를 부르지 않는 세 가지의 조건을 충족한 유일한 방법이 있긴 했다. 처음부터 안개와 싸우지 않는 것. 요컨대 잠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잠을 부르는 약은 금물이다. 전에 이 감기약을 복용했을 때는 얼마안가 졸음이 쏟아졌다. 해야 할 일은 하나. 우선 이 약을 쓰레기통에 냅다…….

그래도, 제럴딘 씨가 날 위해 꺼내준 약인데.

자신을 정성껏 돌봐준 사람이 준비한 약을 소홀히 하는 건 못할 짓이다. 자신의 집에 있던 약이라고 해도. 카트리의 손이 약을 한참동안 만지작거렸다. 입이 음식을 씹듯이 손 안을 돌고 돌았다. 버리지도 못했지만 먹지도 못했다. 그 대신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뜯지 않은 약을 서랍에 넣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하하, 꼭 눈에다 풀이라도 바른 것 같네.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눈 안쪽에서 뻑뻑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기에 뜨거운 손을 가져다대자 조금은 눈의 피로가 가시는 듯했지만 대신에 잠이 쏟아져왔다. 그것만은 안 되는 일이지. 카트리는 곧바로 손을 떼고 의식을 유지하려 무던히 애를 썼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형형색색의 빛이 불을 밝히고 사라지기를 거듭했다.

우와, 언제 불꽃놀이가 시작된 거지? 완전 특등석이네.

속으로 실없는 말을 해봐도 눈부신 정도가 심각하다. 두통을 유발하는 빛은 색이 선명하니 형태가 뚜렷했다. 카트리는 그 형태가 안개 같다고 생각했다. 안개가 확실한 형태를 갖고 있다니 웃긴 일이다.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일렁이는 안개가 카트리를 집어삼킬 듯이 다가온다. 안개는 도망갈 수 없는 수마였다. 자신을 잡고 놓치지 않는 꿈 그 자체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도 아니고. 괜찮겠지, 도 아닌.

자기가 생각해도 근거도 없는 말을 지껄였다. 결국은 정신력 싸움이다. 카트리는 자신의 정신력에 상당한 자신이 있었다.

이긴 싸움이야.”

포도 맛 젤리의 포장을 뜯고 동봉된 스푼으로 한입을 떠서 입에 옮겼다. 음식을 씹는 행위는 잠을 쫓는 효과가 있다. 맛도 있으니 일석이조다. 더군다나 제럴딘이 카트리를 위해 일부러 사다준 것이었다. 수마 따위에 질 리가 없다.

한 가지 간과했던 것은, 카트리에일 레이튼이라는 인간은 본인의 욕구를 억누른 적이 전무하다고 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욕망이 추한 것이라 여기지 않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얻고 싶은 것을 얻는, 누구나가 바라는 삶의 방식을 추구해왔다. 그러면서도 그를 위해 억지를 부린 적은 없다. 남에게 피해를 입힌 적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오로지 타고난 재치와 노력으로 성취해냈다. 욕망에 충실한 인생이라니 얼마나 멋진가. 장황하게 말했지만 결론은 먹고 싶을 때는 먹고 자고 싶을 때는 잔다 이 말이다. 그래, 자고 싶을 때는 잤다. 수면욕도 인간이 가진 기본욕구 중의 하나였다.

……졸려.”

몸과 마음이 하고 싶은 일이 일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카트리에게 있어 그것은 이미 조건반사와도 같았다.

 

 

카트리가 런던을 떠나 자취하는 것이 결정된 날. 허셜은 카트리를 불러내 마지막 수수께끼라며 진실의 조각을 건넸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듣고 카트리는 질색하며 반론했다. 내가 비록 런던을 떠날지라도 언제든지 돌아와서 아빠가 내는 수수께끼를 풀 것이라고. 풀고 싶노라고.

설마 아빠도 런던을 떠날 줄은 몰랐지. 그리고 그 수수께끼라는 것이, 그런 것일 줄은.

카트리가 흑백영화처럼 색조가 없는 런던의 거리를 달리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정확히는 그날부터 색을 잃은 것일 테다. 자신이 자랐던, 사랑했던 런던은 한순간에 빛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아주 가끔씩 나타나 자신을 흔들어 놓는 그 꿈을 카트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정말로, 아주 가끔이었으니까.

하지만 허셜 레이튼의 실종소식을 들은 날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그 이후 카트리의 꿈에 이변이 생긴 것이다. 허셜 레이튼의 행방불명은 틀림없이 꿈의 빈도를 높여주는 촉매가 되었고, , 꿈속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아마도 원인은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간 런던에 안개가 자욱했던 탓이다.

안개가 낀 이후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어진 런던에서, 연기 속으로 사라지듯이 안개 속에 먹혀들어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쫓았다.

삼키지 마. 데려가지 마.

처음에는 허셜이 그의 의지로 등 돌아 떠나는 것을 부정하듯이 필사적으로 안개를 향해 손을 뻗어 매달리던 카트리는, 점점 멀어져가는 등을 보며 허셜을 향해 애타게 애원했다.

가지 마요!

 

──, !”

침대에서 튀어 오른 카트리가 매트리스가 요동치는 반동으로 엎어진 젤리를 보고 기함했다. 꿈에 시달린 끝에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목소리보다 젤리의 최후를 목격한 충격으로 흘린 목소리가 더 컸다. 목만 온전했더라면 큰소리로 절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절대 잠들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며 행실이 나쁜 것을 인지하고도 머리맡에 두었던 젤리가 끝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당신 그렇게까지 젤리를 좋아했어?”

절망감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을 때 들려온 목소리에 카트리는 흠칫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제럴딘이 손에 물수건을 갖고 있었다. 얼마 본적이 없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서. 카트리는 물기가 어린 자신의 어깨를 보고 제럴딘이 카트리를 몇 번이나 흔들어 깨웠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수건으로는 내 땀을 닦아줬겠지.

젤리 말이에요, 제럴딘과 어감이 비슷하지 않아요?”

젤라틴 쪽이 비슷한가? 헤실 웃으며 능청스럽게 나불거리는 입을 제럴딘이 수건으로 툭 쳤다.

걱정한 내가 바보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럴딘 씨.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것뿐이에요.”

제럴딘의 입장에서는 시시한 농담을 뱉으면서도 연신 숨을 내몰아쉬는 그녀를 걱정하지 말라는 게 무리였다. 제럴딘은 자신을 안심시키려 지긋이 바라보는 카트리에게 내심 혀를 차면서도 얌전히 수건을 내려놓았다. 카트리는 그런 제럴딘을 보며 축 처진 눈썹으로 난처한 듯이 웃을 뿐이었다. 의심의 빛을 띠고 올라간 눈초리도 힘이 들어가 굽어진 눈썹도 약간 오므린 입술도, 얼핏 보기에는 언짢아하는 표정으로 보이나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것을 카트리는 알고 있다.

아무튼, 약을 먹었으니 약 효과가 나타난다면 신경 쓰지 않아도 깊은 잠을…….”

제럴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카트리가 멈칫하더니 젤리를 든 채 움직임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둘을 감싸고 있던 공기도 멈췄다. 아무도 숨을 쉬고 있지 않다. 제럴딘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이 걸린 거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깊은 잠? 아니, 카트리의 반응은 그보다 빨랐다. 그렇다는 건.

카트리, 약은 어쨌어.”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행동을 보이면 제럴딘 앞에서 얼버무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방심했다. 감기로 감각이 무뎌진 탓이었다. 카트리가 목 언저리를 어루만지며 눈을 굴렸다.

제 위 속에 있지 않을까요?”

왜 의문형이야? 묻는 말에 확실하게 대답해.”

카트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그시 눈을 감고서 몸을 일으켜 침대의 등받이에 어깻죽지를 기댔다. 그 몸이 약간 서랍 쪽에 치우쳤다.

당신의 위는 서랍처럼 생겼나보지?”

오늘은 상태가 영 안 좋다.

카트리는 진심인 프로파일러를 상대로 만전의 상태가 아닌 자신이 흐지부지하게 넘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쓸데없는 노력일 테니까. 그래서 남들보다 많이 들어가나 봐요. 나오려는 농담을 애써 삼키고 푹신한 이불을 의미 없이 손으로 쓸어내렸다.

왜 약을 안 먹은 거야?”

제럴딘은 서랍 안을 뒤지지도 않고 카트리를 응시하며 조용히 물어왔다.

먹기 싫어서요.”

어린애의 투정과도 같은 대답에 제럴딘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당신한테 먹기 싫은 것도 있어?”

하하. 메마른 웃음을 흘린 카트리가 시선을 내리깔고 이불에서 손을 치웠다. 등받이에 몸을 싣고, 나른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느릿한 말을 토해냈다.

잠이 들기가, 싫어서요.”

이렇게 될 걸 예감하고 있었다는 듯이. 어딘가 해탈한 말투로.

어디까지 내다보는 것인지 모를 눈으로 카트리를 빤히 쳐다보던 제럴딘이 엄지손톱을 입가에 가져갔다.

카트리 당신, 혹시…….”

몸 상태가 안 좋은 날에는 항상 같은 꿈을 꿔요.”

혹은, 안개가 짙게 깔린 날에는.

누군가는 악몽이라 부를 꿈을.”

땀으로 끈적하게 들러붙은 잠옷의 웃통을 잡아당긴 카트리가 가늘게 뜬 옆 눈으로 제럴딘을 주시했다. 제럴딘은 그 눈에 짙게 깔린 그늘을 보고 숨을 삼켰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악몽을 뭐라 부르지? 그렇게나 시달리면서도 악몽이라 생각지 않는 건가?

──악몽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카트리는 이때만큼은 방정맞은 자신의 혀를 깨물어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입에서 듣는 것이 싫어 먼저 실토해버렸다. 꿈의 내용까지는 말하기가 껄끄러워 입을 다물었지만. 굳이 추궁하지 않는 제럴딘도 꿈의 내용까지 들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언제부터 그랬는데?”

시기를 말하면 들킨다. 그녀라면 알아차릴 것을 직감한 카트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야기를 애매하게 흘렸다.

주기적으로 그런 꿈을 꾸는 거라면 카운슬링을 받는 편이.”

그런 말마요.”

그 말은 카트리의 생각보다 단호한 어투로 흘러나왔다. 카트리는 자신의 꿈속에서 허셜의 허상을 내쫓고 싶지 않았다. 비록 꿈에서도, 꿈에서 깨어나서도 눈물짓게 만드는 허상일지라도 그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아주 나쁜 꿈은 아니다.

그것이 설령 나를 두고 떠나가는 뒷모습이라 할지라도.

제 억지인건 알지만 제 방식대로 극복하고 싶어요.”

상담은 스스로 어쩔 방도가 없는 문제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야.”

해결법은 있어요. 쭉 시도하고 있죠.”

요컨대, 꿈속에서 그를 잡으면 되는 것이다. 아니면 하다못해 그 빌어먹을 안개라도 사라지면. 카트리의 꿈에 안개가 드리우기 전에는 그래도 이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색을 잃기만 한 거리를 달릴 때는 허무함과, 허망함과, 허탈함이 지배하는 감정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것 나름 괴롭긴 하지만.

그래서 그 시도가 언제 성공하는데?”

글쎄요.”

카트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짧게 답했다. 시도할 기회자체는 많았다. 몸이 좋지 않을 때뿐만 아니라, 안개가 시야를 차단할 정도로 뿌연 날이면 반드시 그 꿈을 꾼다고 해도 좋았으니까. 어쩌면, 안개를 보았기 때문에 꿈을 꾼다기보다는 안개가 자신의 컨디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몸 상태가 안 좋은 때에 악몽을 꾸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만 그 횟수가 빈번하다는 건 문제야. 몸의 회복 면에서 좋지 않은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큰 고통이지.”

그건 인정해요. 아무리 저라도 넌더리날 때가 있거든요. 심리적인 문제라면 다른 사람이 곁에 있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나보네요.”

그를 내쫓기는 싫었지만, 잠시 내보내고 싶을 때는 꽤 있었다. 지조 없어 보일지는 모르나 중요한 사건조사를 앞둔 날에 런던거리에 안개가 끼는 날이면 정말이지 오만생각이 다 든다.

당신이 잠들었을 때 난 부엌에 있었어.”

카트리의 말을 지적해오는 목소리는 어딘가 불만스러웠다. , 그랬죠. 카트리는 제럴딘의 의중을 파악했으면서도 그녀의 말에 동의만 했다.

어찌됐든. 나으려면 잠을 자야해. 그러니까 한 번 더 실험해보는 게 어때.”

제럴딘이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말을 쥐어짜내듯이.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면서. 카트리는 자신이 그녀가 표현할 수 있는 호의를 그 한계까지 받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기에 재촉하지 않고 앞말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당신이 잠들 때까지, 그리고 잠든 후로도 내가 곁에 있어볼 테니까.”

그럼 손도 잡아줄래요? 어제의 자신이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테지만. 이미 충분할 정도로 받아버렸으니 이 이상을 바랬다가는 보답하기도 힘들다.

제럴딘 씨, 스프는 어떻게 된 거예요?”

그러니 대신에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것을 물어봤다. 부엌에 꽤 오랜 시간 있었을 터인 제럴딘은 물수건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요리 중이라면 오래 자리를 비울 수도 없을 텐데.

, 사실 예상이 가지만.

묻지 마.”

스프를 죽 쒔군요.”

시끄러워.”

오랜만에 끓였으니 어쩔 수 없잖아. 당신이 자고 일어나면 제대로 끓일 거야. 불쾌한 듯이 쏘아붙이며 서랍을 연 제럴딘이 이번에는 블루베리 맛 젤리와 약을 건네 왔다. 웃음을 터뜨리는 카트리의 팔을 반대쪽 손으로 찰싹 치고서. 어깨를 떨며 약을 받아든 카트리는 제럴딘이 보는 앞에서 망설임 없이 약을 뜯어 입에 털어 넣었다. 제럴딘은 예측보다 빠른 행동에 놀라면서도 서랍위의 물 컵을 찾았다. 그 사이 카트리는 젤리의 포장을 뜯어냈다.

카트리, .”

제럴딘이 물을 건넬 새도 없이 젤리를 한입 떠서 같이 삼켰다. 휘둥그레지는 눈과 마주친 눈이 만족스러운 듯이 휘었다.

젤리와 약이 몸에 스며드는 듯 했다.

 

 

침대 옆에 놓인 책상의자에 걸터앉아 아무거나 골라잡은 책을 무릎위에 펼치고 있기를 수 십분. 애초부터 읽을 생각이 없기에 페이지는 쭉 그대로였다. 이따금 손이 심심해지면 한두 페이지 넘길 뿐이다. 제럴딘이 하는 일이라고는 가끔 생각난 듯이 카트리의 이마에 있는 물수건을 갈아주는 것과, 그녀의 잠자는 얼굴을 바라보며 혹여나 악몽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나 체크하는 것이 다였다. 고요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제럴딘의 사고는 스프를 망치고 망연자실하게 부엌을 나왔을 때로 돌아갔다.

정직하게 말하기는 싫고, 얼버무리자니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고. 어떤 선택을 하든 일의 전말을 내다보고 제럴딘 씨도 실패할 때가 있네요? 라며 빙그레 웃을 모습이 떠올라 자연스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식재료를 쥐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터뜨려버렸을 거다. 환자인 카트리를 혼자 방치해두는 것도 마음에 걸려서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로 마음먹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스프대신, 물을 새로 받은 대야와 수건을 챙겨서.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카트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하게 앓는 소리가 들려 제럴딘은 그 즉시 짧은 거리를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서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발견한 것이 땀만이라면 좋았을 텐데. 제럴딘은 카트리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찌그러진 눈썹이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울음을 참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보면 안 될 것을 봐버린 기분이 들었다.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은 착각이다. 서둘러 책상에 대야를 얹고, 거기서 수건을 꺼내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장거리를 달리는 사람처럼 숨을 번갈아 쉬며 헐떡이는 모습은 보고 있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땀을 닦아낸 자리에 손을 대보니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겨우 내린 열이 다시 오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는지 모른다. 몇 번이나 흔들었는지도.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달구는 열기에 허덕일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땀을 닦아주는 것뿐인데, 정작 제럴딘의 몸에도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점점 초조해지는 제럴딘의 냉정함을 되찾아준 것은 그녀의 머리맡에 보이는 보라색의 반고체였다. 용케 안 엎어지고 탄력 있게 흔들리는 모습이, 뭐랄까, 이런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다고나 할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난 카트리는 자기 몸보다 곧이어 엎어진 젤리를 더 신경 쓰질 않나. 회상에 잠겨있던 제럴딘의 입에서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이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것인지 웃겨서 나오는 것인지 본인도 알 길이 없었다. 이런 시시한 일로 웃는다는 것 자체가 제럴딘에게 있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카트리는 때때로 자신의 분석결과를 배반하고 의외의 결과를 가져다온다. 분석관으로서 그 모습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아는 그녀. 내가 모르는 그녀. 그러나 내가 알 수 없는 그녀는 없다. 알고 싶지 않은 그녀도 없다.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것이 오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라면 가능하다고, 상대가 카트리라면 가능하다고 제럴딘은 생각했다.

, …….”

제럴딘은 몸을 뒤척이는 카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다시금 악몽이 찾아와 그녀를 몰아세운다면, 이번에야말로 무슨 수를 써서든 깨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 아직 이다.

카트리에일 레이튼은 그렇게 나약한 인물이 아니야.

 

 

카트리의 기억은 늘 마지막에 돌아왔다. 그를 쫓는 것을 포기하고 걸음을 멈췄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온전히 21살의 정신으로 돌아왔다. 기억을 잃고 한낱 어린아이가 된 카트리는 매번 전력으로 달렸고, 매번 닿지 못했으며, 매번 기억을 되찾고는 절망했다. 카트리가 이 꿈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그밖에도 많은데, 되찾는 것은 항상 이것 하나였다. 그것도 안주느니만 못했다. 카트리의 힘으로 이루어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포기하는 게 조건이라니, 장난해? 마지막 순간에 절망을 맛보라 이건가?

카트리의 볼을 타고 어렸던 자신이 흘린 눈물이 흘러내렸다. 허셜의 모습은 너무 멀어져서 자그마한 점처럼 보였다. 이제 안개가 주위의 모든 것과 카트리를 집어삼킬 차례다. 앞이 전혀 안보일 정도로 시야가 새하얗게 변색되면, 이 꿈도 끝이 난다.

이번에도 무리였어. 왜 꿈속에서까지 이런 비참한 기분을 느껴야해? 저건 진짜 아빠도 아닌데. 아냐. 진짜 아빠의 정의가 뭔데? 그렇게 따지자면 현실의 허셜 레이튼이라는 사람도…….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부정적인 사고를 끊어내기 위해 카트리가 할 수 있는 건 안개 막이 자신을 감싸고 현실로 돌아가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괜찮아.”

지금은 좀 힘들어도 나라면 금방 털어낼 수 있잖아. 부정적인 생각 모두, 진심이 아니야. 다음에도 힘낼 수 있어. 그러면 언젠가 잡을 수 있을 테지. 나라면 할 수 있어.

카트리는 몇 번이나 반복한 꿈에서 몇 번이나 반복했을 말들을 끄집어냈다.

퍽이나.”

조소가 섞인 말은 현실을 일깨워주는 듯한 냉랭한 어조였다. 그것은, 카트리가 입 밖에 낸 것이 아니었다.

저 뒤를 쫓을 거라면 그런 모습으로는 안 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런 짧은 팔과 다리로는 성인 남자를 쫓을 힘이 없다. 상냥한 아빠라면 어린 자신이 아직 아빠가 필요하다고 외치면 돌아와 줄지도 모른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 이제 어리지 않으니까.

정신이 좀 들어?”

, 확 드네요. 현실에서는 정신이 없어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어린아이처럼 작지도, 약하지도 않다. 그가 직접 찾아와주지 않아도 쫓아갈 힘이, 자신에게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걸 자기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카트리가 생각을 끝마쳤을 때, 점점 작아져가던 등이 멈춰 섰다. 마치 카트리를 기다려주는 것처럼. 그렇게 애타게 소리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 카트리는 그때 처음으로 꿈에서 앞이 아닌 옆을 보았다. 아까 들린 목소리의 주인이 서있으리라 짐작하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얼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에 지적인 눈. 안경을 쓴 천재 분석관.

제럴딘 씨.”

날카롭게 치켜뜬 눈이 카트리를 향했다.

제가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꿈이라도 제럴딘 씨는 제럴딘 씨군요. 너무나도 그녀다운 앙칼진 대답에 카트리는 실소를 흘렸다.

쫓든 말든 따라잡든 말든. 당신 마음대로 해.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무심한 태도를 일관하는 그녀의 말은 카트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뭐든 가능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렇죠. 전 아빠를 뛰어넘을 거니까.”

꿈속의 아빠조차 뛰어넘지 못해서야 현실에서는 어떻겠는가. 꿈과 상상을 뛰어넘는 현실에서 그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따라잡는 것만으로는 안 되지. 만족 못해요.”

냉철한 분석관은 카트리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대꾸도 않고 고개를 휙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서 따라가라는 제스처였다. 그녀를 따라 정면을 직시한 카트리의 귀로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라는 말이 들려왔다. 귀에 익은 울림. 현실의 그녀에게서 제일 많이 듣는 대사일지도 모른다. 카트리는 옆에 선 제럴딘을 흘끗 쳐다볼까 망설이다가 그만뒀다.

달리기 시작하면 이제 포기할 생각은 없다. 이대로 끊임없이 달리겠지. 그러다보면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과도 헤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

제럴딘 씨와도.

그녀가 항상 카트리의 페이스에 맞춰서 옆을 달려주리 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 당신의 말대로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녀라면 앞으로도 자신의 길을 관철해나갈 것이다. 헤어져도 언젠가, 문득 옆을 보면 또 다시 그녀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카트리는 처음으로 등 뒤를 의식하며 내달렸다. 발을 내딛어 다시 한 번 뛰기 시작했을 때, 올려다보던 세상이 바짝 다가왔다. 내 몸이 아닌 것같이 불편했던 팔다리가 익숙한 감각과 함께 허공을 내질렀다. 안개를 가르고 선명해진 시야에, 바람을 가르고 눈에 들어온 풍경이 색을 더했다.

달릴 때마다 몸에 닿던 하늘하늘한 프릴이 바람에 힘껏 휘날리는 코트가 되었다. 안개 속에 가려진 어두컴컴한 런던 거리가 카트리에게 친숙한 가게와 사람들로 들끓으면서, 카트리를 줄곧 지배해왔던 공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공포. 그런 자신의 곁에 유일하게 존재하며 맴돌던 공포가. 두려움을 내쫓은 자리에 들어앉은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일상을 보내며 지극히 평범한 풍경을 자아냈다. 아니, 반대다. 그들이 카트리의 두려움을, 나약함을 쫓아낸 것이다. 색을 되찾아준 것이다.

멀어져가던 뒷모습도 흐릿해지던 시야도 조용한 거리도 모두 정반대로.

카트리가 팔을 휘젓자 이제까지 잡히지 않던 그것이 색은 없어도 뚜렷한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있던 레이튼 모빌을 밟고 뛰어오른 카트리가 두 팔로 있는 힘을 다해 안개로 된 막을 끌어내렸다. 커튼콜의 시간이다.

──긴 악몽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악몽이었다.

그럼에도 나만의 힘으로 끝내는 건 불가능했지만, 당신을 추월하는 건 내 힘으로 해낼 테니까.

자신이 다시 발돋움하면서 걸음을 재개했던 뒷모습이, 이번에는 확실하게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코트자락이 안개를 걷어내고 달려 나갔다.

확실한 희망을 잡았다.

새로운 막이 오른다.

 

 

눈부시다. 어두운 실내에 쬐어드는 빛이, 눈부시다.

커튼의 희미한 틈새 너머로 보이는 창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카트리가 본 빛은 그쪽이 아니라 침실의 문밖에서 새어나오는 거실의, 집안의 불빛이었다. 카트리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잠들기 전보다 몸이 가벼웠다. 큰 어려움 없이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고, 뻐근한 어깨를 한손으로 꾸욱 누르며 옆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얼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에 지적인 눈. 안경을 쓴 천재 분석관.

제럴딘은 잘 잤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안경 너머로 눈을 마주쳐올 뿐이었다.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손을 잡아주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도 이마에 맺힌 땀은 닦아줬으리라는 것도.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줬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좋은 아침이에요. 제럴딘 씨.”

낮이야. 해가 지고 있다고.”

당신, 아직 상태가 안 좋은 거 아냐? 이어지는 신랄한 말에 카트리가 실소를 흘렸다. 현실의 제럴딘 씨는 차원이 다르시군. 역시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라니까.

 

 

약 잘 듣네요.”

열이 내리고 몸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된 카트리는 거실로 나왔다. 더 누워있으라는 제럴딘의 설교에도 끄떡하지 않고 거실 소파에 자리 잡은 카트리가 부엌에서 한창 스프를 준비하고 있는 제럴딘에게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몸이 살만하니 또 말썽을 부리려고 자세를 잡는군.

당근을 썰던 제럴딘이 완전히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은 카트리를 성가신 듯이 쳐다봤다.

깊이 잠들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순순히 약만 먹으면 됐을 것을.”

아뇨, 꿈은 꿨는데요. 그 말은 하지 않고 애매한 웃음을 흘린 카트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실험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약으로 해결해버렸으니 아무것도 알 수 없잖아요.”

제럴딘이 식칼을 든 손을 멈췄다. 제럴딘이 꺼낸 말이었다. 사람이 곁에 있으면 나쁜 꿈을 꾸지 않는지 시험해보자고.

다음에도 어울려주실래요?”

분명 다음부터는 괜찮겠지만. 카트리는 그 말도 굳이 할 필요는 없겠거니 했다.

다음에도 약으로 해결해.”

제럴딘 씨의 약이 잘 들어요~”

내가 만든 거 아냐. 그리고 당신 집에 있던 약이거든?”

냄비에 우유를 붓는 제럴딘과 소파의 팔걸이에 턱을 괸 카트리의 눈이 맞았다. 그 상태로 카트리의 입이 깔끔하게 호선을 그렸다.

감기약에 뜻밖의 효과를 부여한건 제럴딘 씨라고 생각하는데요.”

?”

감기약의 효능이라기보다는 같이 먹은 것의 효능에 가깝네요.”

무슨 소리야?”

카트리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제럴딘이 허리를 손으로 짚으며 비스듬히 섰다. 설명을 요구하는 제스처였다.

안개가 사라졌어요.”

정신이 흐릿할 때 흔히들 머릿속에 안개가 꼈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 안개를 말하는 건가 싶었다. 제럴딘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한 카트리가 그런 제럴딘을 방긋방긋, 주변에 해바라기가 피어올라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해맑게 응시했다. 천재 프로파일러시니 이 정도는 물론 알아들으셨죠? 라는 목소리가 자동 재생되었다. 물론 이걸 설명 없이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신이 먹을 스프에 독을 탈 수 있는 건 나라는 걸 명심해.”

거기에 독을 타면 제럴딘 씨도 독에 당하시는데요.”

하여튼 말이나 못하면. 제럴딘이 냄비를 들고 소파에 앉아있는 카트리를 지나쳐 식탁에 도착했다. 고개를 뒤로 재낀 제럴딘의 눈길 한 번에 일어선 카트리가 부엌에 들어가 두 사람분의 식기와 스푼을 챙겨 나왔다. 드디어 식사시간이다.

오늘은 여러모로 신세 많이 졌어요.”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나무의자를 끌어당긴 두 사람은 노을빛으로 물든 런던거리를 바라보았다. 제럴딘이 스프를 만드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앞치마를 매달라며 조르는 카트리에게 대항할 기력이 없어 서두른 걸지도 모른다. 그때의 식겁하던 표정이 떠올라 괜스레 웃음이 새어나갔다.

카트리는 주홍빛으로 뒤덮인 거리를 내다보는 제럴딘의 옆모습을,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까지 응시하고 있었다.

안개를 뚫고 등장한 그녀는 카트리에게 안개를 걷어내고 색을 되찾을 힘이 있다며 상기시켜 주었다. 카트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또 다시 잊어버리게 될 것 같을 때에. 또 다시 잃어버리게 됐을 때에. 다시 또 옆에 서주세요.

말로 해버리면 너무나도 무겁다. 하지만 제럴딘이 상대라면 꼭 말로 할 필요는 없다.

, 오늘 같은 일만 없다면야…….”

없길 바라야죠. 제럴딘의 말에 속으로만 답한 카트리가 수건을 손에 감싸고 냄비뚜껑을 집었다.

냄비뚜껑을 열자마자 우유를 베이스로 한 스프의 달콤한 냄새가 올라왔다. 제럴딘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표정을 지우고 국자를 들었다. 당근, 양파, 버섯, 브로콜리, 감자……. 갖가지 재료가 밸런스 좋게 뜨인 스프가 카트리의 앞에 놓였다. 그 향기와 겉모습은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카트리의 식욕을 자극했으니까.

이번에는 성공했네요. 스프를 입에 넣은 카트리가 환한 미소를 띠었다.

 

 

이게 얼마만이지.

그날 이후, 이 꿈을 꾸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이제 안 좋은 꿈을 꾼다는 핑계로 제럴딘의 집에 묵는 것도, 제럴딘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도 힘들어질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카트리는 우선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자신의 앞에 서있는 커다란 등이 카트리가 잡으려고 하지 않는 이상은 멀어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내 꿈이니까 뭐, 내 감이 틀릴 일은 없겠지.

지금의 카트리에게는 심리적인 여유가 있었다. 카트리가 주변을 둘러보자 자신이 아는 그대로의 런던이 펼쳐져있었다. 화창한 날씨, 알록달록한 벽돌, 사람들의 대화소리. 특별한 건 없다. 특별한 게 없기에 특별했다.

그리고 문득, 안개의 막을 내린 후로 자신의 기억이 완전히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대로, 지금의 나로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21년간 살아온 과거의 기억을 모두 끌어안고서. 그 안개 막이 존재하던 때에는 비겁하게도 기억을 줬다 뺏었다 줬다 뺏었다…….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마지막으로 오늘의 자신을 되돌아봤다. 현실에서의 카트리에일. 오늘도 활기차게 의뢰를 달성했다. 이 꿈을 꿀만한 일은 없었는데. 몸 상태가 안 좋기는커녕 컨디션이 최고로 좋은 날이었다. 그 말은 즉슨.

아빠를 잡기에도 최고로 좋은 날이라는 뜻이지.”

둘도 없는 기회다. 카트리는 그 자리에서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오늘은 각오하셔야 할걸요?”

그는 대답 대신 모자를 매만졌다.

좋아, 가자.

 

 

……의기양양하게 쫓은 것은 좋았으나 예상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허셜과 카트리가 가까워졌을 때 그 사이를 가로막고 온갖 동물들이 떼를 지어 몰려온 것이다.

이건 반칙이잖아!”

그러나 카트리가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상황을 지켜보던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동물들이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질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트리가 그쪽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먹을 것을 든 막심 형제의 쌍둥이 동생 쪽인 레지와 레스토랑의 직원, 동물들을 향해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이름 모를 고양이 세 마리가 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그들이 도와준 모양이었다카트리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멀어져가는 허셜을 급하게 뒤쫓았다. 두 사람이 카트리에게 손을 흔들고 세 마리가 카트리를 격려하듯이 울었다.

백부장은 조카에게 있어 베프 같은 백부!”

벌어진 거리를 가까스로 좁혔을 때, 어디선가 신박한 말장난을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기와 함께 발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 들어 발밑을 보니 카트리의 다리가 땅에서부터 얼어붙어 있었다.

설마 썰렁해서 이렇게 된 거야? 그렇다면 그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난 나름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카트리가 남일 같지 않은 씁쓸한 기분으로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때, 자신을 부르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트리!”

한스 씨.”

막심 형제의 쌍둥이 형 쪽이었다. 그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망치를 꺼내들더니 카트리의 발밑의 얼음을 으깨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한스는 수줍은 듯이 볼을 긁적이고는 망치를 집어넣었다. 물을 흠뻑 흡수한 발을 들어 올려 탈탈 털은 카트리가 다시 내달렸다.

그리고 얼마안가 샛노란 스쿠터가 카트리의 앞길을 막아섰다. 카트리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위치를 옮기면서. 여기까지 오면 카트리도 이 참신한 방해가 계속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이 정도는 자신의 운동신경이라면 충분히 비켜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옆으로 뛰었을 때 발소리가 몰려왔다. 수가 많다. 카트리가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뒤를 돌아보니 당당하게 선 래트맨즈가 있었다.

카트리!”

여러분.”

여긴 맡겨줘!”

뭘 맡겨달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옹기종기 모여든 다섯 명이 스쿠터를 빙 둘러싸고 한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카트리는 그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아까보다 조금 가까워진 그를 쫓아갔다. 그 후에도 많은 장애물이 카트리를 가로막았고, 많은 사람들이 카트리를 도와줬다.

이제까지 이런 방해가 있었던가?

답은 금방 나왔다.

이게 진짜 모습이 아닐까. 자신이 안개로 가려버렸던 런던의 진짜 모습. 그리고 이제야 시작된 나와 아빠의, 우리들의 술래잡기.

사랑하는 런던,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사람.

사랑해마지않는 기억들.

그토록 잡고 싶은 상대에게 닿는 것을 방해받고 있는데도 왠지 모르게 기뻤다. 방해받는 것이 납득이 갔으니까. 그는 런던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빠, 런던에게 사랑받고 있는 건 아빠만이 아니에요.

조금만 더!”

앞에서 강풍이 불어왔다. 개의치 않고 달려가는 카트리의 정면에서 무언가 새까만 것이 날아왔다. 카트리는 뜀박질을 멈추고 망설임 없이 그것을 붙잡았다. 어째선지 다른 장애물들과는 달리 피할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다란 실크햇.

모자를 움켜쥔 손에서 시선을 올려 모자의 주인을 바라보자, 그는 멈춰 서서 모자가 위치했던 자리를 손으로 훑고 있었다.

지금 잡아야 해.

카트리의 직감이 그렇게 속삭였다. 다시 고개를 숙여 모자를 봤을 때, 손에 들려있던 실크햇은 그 실크햇의 모양을 딴 자신의 머리장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카트리는 익숙한 그것을 자연스럽게 머리 위로 가져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뛰는 데에 방해가 되니까.

──아빠!”

이윽고.

모자를 눌러써 감추던 눈이. 부드러운 미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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