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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카트제럴 판타지 AU 1-2.

블랙커피우유 2018. 6. 4. 22:02

*퇴고 안함/카트제럴 전제/장편 연재/내킬 때마다 올라옴/판타지 AU/설정은 적으면서 생각나는대로



양피지에 붉은 태양이 지고 푸른 달이 차오른다. 새빨간 잉크는 마치 태양열에 못 이겨 재가 되어 사라지듯이 공중에서 흩어져 사라지고, 새파란 잉크가 물을 따르듯이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원의 형태를 이루었다.

얼마 안가 작업을 끝낸 루시가 통행증을 돌돌 말아 카트리에게 건넸다.

 

의외로 간단하네요.”

마법 스크롤을 쓰는 것뿐이니까.”

 

내심 어떤 주문을 읊을지 기대했던 카트리는 김이 샜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런 마법은 보안상 오로지 스크롤의 힘만을 빌린다. 카트리도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용한 스크롤을 묶은 끈도 봉인구의 한 종류다. 비밀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면 외부인을 들여놓지도 않았을 터다.

통행증을 주머니 속에 넣은 카트리가 시선을 올리자 루시와 눈이 맞았다. 덕분에 루시의 눈과 입이 기분 좋게 호선을 그리는 모습을 톡톡히 보았다.

 

다시 한 번, 런던에 온 걸 환영해. 카트리!”

 

아니지, 어서와 라고 해야 하나? 멋쩍게 웃는 루시를 보며 카트리는 이제야 런던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다녀왔습니다!”

 

카트리도 루시를 따라 방긋 웃었다. 그렇게 둘이 마주 보고 얼마나 지났을까.

꼬르륵. 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의 배가 먼저 소리를 냈다. 소리가 꺼지고 두 사람이 오묘한 표정이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카트리와 루시는 마주본 채 쓴웃음을 지었다.

 

우선, 배부터 채우러 갈래?”

그래요. 배가 등이랑 붙어서 장기가 위쪽으로 다 쏠리겠어요. 근처에 맛있는 가게 알아요?”

알다마다. 여기 맛집은 내가 제일 잘 꿰고 있을 걸.”

 

루시가 히죽거리며 답했다.

 

저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떨어져있던 기간이 기니까 여긴 루시에게 맡길게요.”

그러면 최근에 생긴 식당 중에 좋은 곳이 있어. 거기로 가자.”

 

카트리가 문을 지나는 사이 루시는 사방팔방에 놓인 가방들 중 하나를 들어 올려 들쳐 맸다. 경비대 막사에 사물함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루시, 근무시간에 이래도 돼요?”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이 정도는 봐주시겠지.”

저를 핑계거리로 쓰시는 건 아니고요?”

그렇게 보였다면 섭한데.”

 

막사를 빠져나온 두 사람이 배를 채울 생각에 헤실 거리며 식당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이때를 기다린 듯이 등 뒤에서 벽을 콩콩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뒤돌아본 둘 중 한사람이 무심코 소리쳤다.

 

리들리 축제위원장님?!”

? 축제위원장이요?”

어디에 가나 보네? 타이밍이 안 좋았던 모양이야.”

 

신나게 들쳐 맨 가방끈에 올렸던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루시의 기분을 대변하는 듯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카트리가 축제위원장이라는 여성에게 용건을 물었다.

 

급한 볼일인가요?”

, 조금 상담할 일이 있어서. 경비대는 근무시간일 테니 기다릴 생각으로 오긴 했어. 그런데 당신은?”

카트리에일 레이튼이라고 합니다. , 귀향한 모험가라고 해두죠.”

모험가? 그거 흥미로운데.”

 

리들리의 호기심으로 충만한 눈빛이 카트리를 살폈다. 왠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을 받은 루시가 카트리에게 눈짓했다.

 

카트리, 미안해. 점심은 무리겠다. 이따가 저녁에…….”

아냐. 그러지 않아도 돼.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차에 방해했네.”

 

음식에 눈이 멀어 일을 등한시 했다고 들으면 상관이 뭐라 하겠는가. 리들리가 일러다 바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괜히 찔린 루시가 고개를 저으려고 했을 때였다.


괜찮다면 나도 동석해도 될까? 모험가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있어.”

 

 

 

위원장님이 만족하시기 에는 조금……, 부족한 가게일지도 몰라요.”

저는 괜찮고요?”

 

걱정스러워 하는 루시의 말에 카트리가 이죽거렸다.

 

모험가는 잡초도 뜯어 먹는다면서?”

편견이에요. 미식가가 얼마나 많은데요.”

편견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유명한 얘기이긴 하지. 풀을 뜯어먹는 모험가 이야기.”

 

여행경비가 떨어진 빈곤한 모험가는 야생동물에 그치지 않고 잡초까지 먹는다는 소문이 한때 퍼지긴 했다. 어디까지나 소문이다. 실제로 있을지도 모르고 카트리도 길가의 꽃으로 요리를 만들려고 시험한 적이 있으나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입을 다물었다. 그 장면을 누군가가 목격해 소문이 퍼진 게 아니기만을 빌 뿐이다.

 

우선은~ 햄버그랑 버섯 스프랑 망고 젤리! 두 사람은?”

탄두리 치킨과 호박 요구르트 스프, 두리안 아이스크림이요.”

코코넛 카레와 레몬 타르트로.”

루시, 샐러드도 시키지 않을래요?”

그래, 나눠먹자.”

 

음식이 나올 동안 물을 홀짝이던 카트리가 한가함을 못 이기고 테이블로 손가락 연주를 하는 루시의 곁에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루시, 그거 가지고 되겠어요?”

……대장님이 뭐라 하시든?”

편지에 루시는 저만큼 많이 먹는다고 써져있었는데요.”

카트리도 얼마 안 시켰잖아?”

그거야 루시에게 맞춘 거죠. 위원장님의 용건을 듣고 나서 다른 가게에도 들러 봐요 우리.”

좋은 생각이야.”

 

카트리와 루시는 오늘이 초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각하는 게 같았다. 음식이 나오기도 전인데 머릿속으로는 디저트가 맛있는 가게를 물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은 이미 가게 밖을 나가있었다. 몸뚱이만 남은 두 사람이 음흉하게도 보이는 미소를 띠며 상념에 잠겨있는 와중에, 리들리가 카트리의 옆으로 의자를 당겨 귓가에 속닥거렸다. 카트리의 흉내였다.

 

너희들의 얘기에 끼워달라고는 안할 테니, 괜찮다면 내 얘기를 들어줄래?”

, 물론 들어야죠! 죄송해요. 잠시 딴 생각을 했네요.”

 

다급히 의자를 땡겨 앉은 카트리가 멈칫했다.

 

그런데, 저에게 말씀하셔도 되는 건가요? 경비대와 의논하실 문제라면 제가 들어서는 안 될 일인 건…….”

루시 양과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사실, 경비대보다는 카트리 당신이 적임이라는 생각도 들어.”

제가요?”

 

그 말을 옆에 있는 경비대원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카트리는 루시의 눈치를 살폈으나 루시는 두 사람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말하기에 앞서, 내 소개가 아직이었지? 리들리 플레먼스야. 런던의 축제위원장을 맡고 있지. 다들 위원장이라고 불러.”

카트리에일 레이튼이에요. 앞서 말했듯 잠깐 고향에 들른 모험가죠. 그래서 상담할 일이라는 건…….”

 

카트리가 운을 띄우자 때마침 셋이 둘러싼 테이블에 음식이 하나 둘씩 날라져왔다. 카트리와 루시의 진지한 얼굴이 그대로 리들리에게서 눈 아래로 이동했다. 알기 쉬운 두 사람의 변화에 쓰게 웃은 리들리가 수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밥부터 먹고 할까.”

 

 

 

각자가 메인 디쉬를 해치우고 아이스크림과 젤리, 타르트를 먹기 시작했을 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히어로 쇼라고, 들어본 적 있어?”

아아, 요즘 유행하는 연극이요?”

설마 경비대가 하라는 건 아니겠죠?”

 

스푼을 흔들며 대답한 카트리의 옆에서 루시는 정직하게도 질색을 하며 되물었다. 리들리는 레몬 타르트를 한입 베어 물고는 한참동안 입을 움직였다. 맛을 음미하는 건지 말을 고르는 건지 모를 시간이었다.

 

그럴 생각이었지만 경비대의 일손이 부족한 건 알고 있어. 무리한 부탁인 것도 알지.”

그래서 제가 적임이라고 한 거군요.”

 

카트리의 아이스크림은 바닥이 난 상태였지만 카트리는 스푼을 부지런하게 움직여 밑바닥을 싹싹 긁기 시작했다. 몇 방울도 채 되지 않는 액체를 입에 털어 넣고 우물거린 카트리가 고개를 까딱여 다음을 재촉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겠다는 뜻이었다.

 

평범한 히어로 쇼는 아니야. 목적이 있어. 그리고 무대에서 하는 것도 아니야.”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연극인데 무대에서 하는 게 아니라니? 카트리도 각지를 여행하면서 연극을 본 경험은 있었다. 나름의 지식도 있다. 히어로 쇼에서는 무대 밑의 관객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있지만 그렇다고 무대를 쓰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세한 사정을 들려주기 전에 확인할 게 있어. 이 일은 위험한 일이야. 카트리, 당신은 모험가라고 했지. 경력을 알 수 있을까?”

 

카트리는 말없이 통행증을 펼쳐 마력을 불어넣었다. 통행증은 신분증의 역할 뿐만 아니라 이력서의 역할도 대신했다. 평소에는 신분증과 여권의 역할을 하지만 주인의 마력을 주입하는 순간 마법으로 숨겨진 내용이 표시되는 식이었다. 발을 들인 지역, 클리어한 던전, 완수한 의뢰의 랭크와 보수까지 철저하게 기록되어 있다. 길드로부터 받은 의뢰가 아닌 개인적으로 받은 의뢰라면 기록되지 않지만 말이다. 그것까지 헤아린다면 카트리의 통행증은 글씨가 빽빽해서 잘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지경까지 가면 통행증을 갱신해서 종이길이를 늘려야겠지만.

 

……놀랐어. 생각했던 것 이상인 걸, 카트리.”

말할 것도 없죠.”

 

입꼬리를 끌어올린 카트리가 통행증을 튕겨 올려 한 번에 휘감았다. 카트리는 자신의 경력에 자신이 있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쌓아올린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본 리들리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 호흡을 정돈했다. 가늘게 내려앉은 눈으로 테이블을 주시하는 리들리의 모습에 카트리와 루시도 이야기에 집중했다.

 

나는 축제위원장으로써, 축제를 성공시킬 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축제가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책임을 다 해야 해. 그런데…….”

 

리들리가 심각한 얼굴이 되어 포크를 천천히 내려놨다.

 

헛소문이라면 다행이지만, 불길한 정보를 입수했어. 리버사이드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 축제의 혼란을 틈타 A국의 범죄단이 L국에 침입할 예정이라는 정보야.”

?! 그건……, 경비대의 사안이 아닌가요? 밀입국이잖아요.”

 

카트리는 루시를 바라보며 물었다. 루시는 느린 템포로 손가락을 놀리며 테이블을 톡톡 치고 있었다.

 

마지막 날은 특히나 화려하니까……. 한심한 말이기는 한데 지금의 경비대로는 순찰을 도는 것만 해도 벅차. 마지막 날은 왕실기사단이 출입국관리장을 경비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는데요, 저는. 솔직히 지금 위원장님의 말로 납득이 갔어요. 웬일로 경비를 서주나 했지. , 경비대에게 맡기기는 불안했다 이 말이네~”

 

그 자리에서 기지개를 피고 창문 밖을 내다본 루시는 단단히 기분이 상한 모양인지 입을 삐쭉 내밀고 있었다. 리들리는 손을 꽉지끼고 식탁에 팔꿈치를 내려놓은 자세로 조용히 말했다. 은밀히 숨겨놓은 보따리를 풀어놓듯이.

 

나는 그 정보가 거짓이 아닐까 해.”

? 그럼 뭐 하러 찾아오신 거예요?”

과연, 그런 거군요.”

 

정보를 종합한 카트리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의자에 몸을 기대어 팔짱을 꼈다.

 

마지막 날에 침입할 예정이라니, 그렇게까지 정확한 정보는 오히려 의심이 가요. 누군가가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게끔 정보를 흘린 게 아닐까요?”

 

힐끗 리들리를 보니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다. 리들리는 아직 카트리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확인할 게 있는데, 정보의 내용은 '침입 한다' 가 끝인가요?”

역시, 당신에게 말을 걸었던 건 정답이었나 보네.”

……뭐예요. 저 지금 되게 소외감 느껴지는데.”

 

루시가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자 카트리와 리들리가 동시에 아이스크림과 타르트를 내밀었다. 루시는 납득이 가지 않는 표정으로 스푼과 포크를 쥐었다.

 

, 범죄단은 축제의 마지막 날 이전에 L국에 밀입국해서, 마지막 날에 무슨 사건을 터뜨릴 생각이 아닐까 해요.”

어째서?”

생각해 봐요. 마지막 날, 이 정보를 알고 있는 모두의 경계심이 어디로 향할 것 같아요?”

아앗!”

 

제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결계가 쳐진 외벽을 타고 올라오는 기행은 벌이지 못한다. 외벽의 위쪽에도 결계가 있으니 비행마법도 소용없다. 런던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출입국관리장을 거쳐야했다.

 

일반주민들은 축제에, 아마도 이 정보를 입수하고 있을 국가는 출입국관리장에 관심이 쏠려있겠구나. 그 외에는 듬성듬성 순찰을 도는 경비대 뿐. 범행을 저지르기에 딱 좋은 환경이란 거네!”

경비대원 본인이 듬성듬성 이라는 말을 쓰는 건 어떨까 싶은데…….”

 

쓴웃음을 짓는 리들리의 옆에서 카트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게 히어로 쇼랑 무슨 상관이죠?”

 

루시도 끄덕끄덕 거리며 카트리의 말에 동의했다. 뭐가 어떻게 되면 히어로 쇼가 된단 말인가. 리들리가 냅킨으로 입을 닦고 신중히 말을 이었다.

 

히어로 쇼를 위장한, 진짜 히어로가 되어줬으면 해. 국가는 거짓정보에 놀아나고 있어. 아마 우리들이 말한다고 무언가가 바뀌지는 않겠지. 이 인원으로 범죄단의 침입을 막기에는 축제기간은 길고. 결국 침입을 용서해버릴 거야.”

 

냅킨이 손의 힘으로 꾸깃꾸깃해졌다. 그러나 리들리는 웃고 있었다. 눈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서도.

 

그들이 축제를 망치러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축제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이용해야하지 않겠어?”

 

이 사람은 뼛속까지 축제위원장이다. 카트리는 새삼스레 감탄했다. 이 사람은 이런 상황에도 축제밖에 머리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 날 당일, 그들을 발견해서 때려잡으라는 거군요.”

그래. 시민들에게는 히어로 쇼로 보이게 잘 꾸며서 말이야. 성공만 한다면 분위기도 고조되겠지.”

그러면 주민들의 협력을 구할 수 없을 텐데요. 런던은 넓어요. 우리들만으로는…….”

그건 히어로 쇼인 척 연기하면서 협력을 얻으면 될 거라고 생각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히어로가 되어달라면서 사람들을 속이라고 말하고 있다. 카트리는 이걸 선의의 거짓말로 쳐도 될지 의문이 들었으나, 런던에 찾아온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만 있다면 시민들은 자신들의 일상이 위협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넘어갈 수 있다. 그 점에서는 최선의 방법이기는 했다.

 

무엇보다도, 리버사이드 페스티벌은 모두가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 축제야. 범죄에 굴복해 망치고 싶지는 않아.”

마음은 이해하지만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경비대원인 루시로서는 리들리의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범죄단이 무슨 목적으로 L국에 잠입하는지 조차 모르는데, 너무 태평한 말로 들린 것이다.

 

그래, 안전이 최우선이지. 하지만 국가가 그걸 택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이유는 짐작이 가겠지만 축제에는 돈이 많이 들어. 그 이상으로 돈을 많이 벌어들이고.”

 

경비대도 국가의 휘하에 있다. 루시도 더 이상 반박하지는 못했다.

 

하고자 하는 말은 이해했어요. 무대를 쓰지 않는다는 말은 그런 뜻이었군요. 굳이 말하자면, 런던 그 자체가 무대가 되겠네요.”

 

런던 내를 발로 뛰어다니며 정체도 불명확한 범죄단을 잡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세 명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다. 카트리는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질문했다.

 

그런데 범죄단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는 건가요?”

어떤 범죄단인지는 특정해냈어. 범죄단의 수령은 수배범이야. 수배지는 많이 가지고 왔으니 당신들에게도 나눠줄게.”

 

리들리가 깜빡했다는 듯이 자켓 안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수배범의 얼굴과 이름, 현상금 액수 따위가 적혀있었다.

 

……사람들의 협력을 구할 때 연기를 하라고 했죠. 이 사람을 찾는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히어로 쇼라고 생각 안할 걸요. 우리들을 헌터로 보겠죠. 더군다나 범죄자가 거리를 활개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패닉이 일어날 텐데요.”

이 사람과 닮은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하면 되잖아? 요즘의 연극은 리얼리티도 중시하니까.”

, 그건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위원장님 은근 막나가는 구석이 있으시네.”

 

카트리와 루시는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생각에 머리를 싸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못 본 척 할 수 있는 안건도 아니었다. 리들리는 이럴 속셈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게 틀림없었다.

 

나는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 그러니 당신들의 판단에 맡기도록 할게.”

잠깐만요, 그럼 사실상 우리 둘이 하라는 거잖아요?”

미안해 카트리. 알다시피 나도 마지막 날에는 순찰이 있어서……, 순찰하면서 수배범이나 수상쩍은 사람을 보면 붙잡기야 하겠지만…….”

 

히어로 쇼는 온전히 카트리의 몫이라는 두 사람의 말에 카트리는 자신의 양심을 내치고 지금이라도 부탁을 거절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카트리의 말보다 리들리의 말이 한발 빨랐다.

 

정식으로 의뢰할게, 카트리에일 레이튼. 의뢰비는──

 

위원장답게 통이 컸다는 말만 해두겠다.

 

이제 한배를 탄 입장이니 잘 부탁해.”

 

언제 가라앉아도 이상하지 않은 배였다.

리들리는 카트리와 손을 맞잡아 악수를 하고 나서 미련 없이 뒤돌아 떠나갔다.

무의식적으로 마주잡아 흔들었던 손에 남은 온기와, 무의식적으로 받아든 돈 자루와, 아마도 무의식적일 루시의 미지근한 눈빛만이 남았다.

그렇게 대본도 필요 없는 연극이 시작되었다.

 

 

 

루시, 다른 가게에 갈까요?”

으음. 솔직히 머릿속이 가득 차서 배까지 빵빵해.”

 

볼일이 끝나자마자 등을 돌려 멀어져가는 리들리의 뒷모습을 두 사람은 허탈한 기분으로 쳐다봤다. 축제위원장이라 지금 이 시기에는 많이 바쁠 테니까. 바삐 움직이는 저 발은 절대 도망가는 게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카트리가 뒷목에 손을 얹어 목을 뒤로 젖히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루시가 카트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고는 소리를 질렀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이다.

 

난 이만 가볼게! 나중에 또 보자!”

내일 제가 경비대에 찾아갈게요!”

그럼 점심시간에 와! 또 같이 밥 먹자!”

 

냅다 달려가는 루시와 급속도로 벌어지는 거리 탓에 둘은 소리를 질러야 했지만 양쪽 다 주위의 시선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루시가 조막만한 점으로 보일쯤에 카트리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천천히 걸었다.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은데도 속도는 그럭저럭 이었다. , 일단은 걸으면서 어디로 갈지 정하면 되니까.

노을색으로 물든 거리는 옛날과 변함이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4년은 긴 시간이었지만 짧은 시간이기도 하니까. 런던을 감싸듯 녹아내린 주홍빛처럼 카트리도 위화감 없이 마을에 녹아들었다. 카트리가 이곳을 떠나있던 시간은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듯이.

가족이 다 같이 살던 집은 아직 팔지 않았다. 그 넓은 집에 돌아갈지, 근신 중이라는 알펜디의 집에 찾아갈지…….

주변을 빙 돌아 산책을 끝낸 카트리가 이번에는 목적지를 정하고 발걸음을 옮긴 그때였다.

저 앞에 세 개의 갈림길이 드러나고, 오른쪽 편에서 노을 녘에는 어울리지 않는 진한 색채가 튀어나와 카트리의 주목을 끌었다.

짙은 보라색 배경의 여미어진 곳을 따라 마도원을 상징하는 수식어가 그림처럼 그려져 새하얗게 수놓아져 있다. 어깻죽지에는 L국 마도원의 문양이 자수되어 있었고, 널널한 두건의 이음새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보석이 박혀있다. 그 옆으로는 꼬은 실타래가 흔들거렸다. 카트리는 먼 거리에서도 한눈에 알아봤다. 마도원의 케이프다. 게다가 가슴 쪽에서 덜렁거리는 보석은 마력이 담긴 마석이다. 상당히 높은 관직이 아니면 용서되지 않는 치장이었다.

목 언저리의 두건에 살짝 파묻힌 곱슬머리가 움직였다. 고개를 돌린 거라 판단하기 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구름이 그 모양을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고, 실없는 생각을 하느라.

그녀의 곱슬머리는 정말로 풍성해서, 구름처럼 보였다. 검은 구름. 구름치고는 무척이나 새까매서 비가 아닌 천둥번개를 부를 듯한 먹구름. ……오징어먹물 솜사탕.

의식의 흐름대로 시시한 생각을 하던 카트리가 시선을 느끼고 머리카락으로 향했던 눈을 옆으로 당기자, 어김없이 그녀와 눈이 맞아버렸다.

카트리는 눈이 맞은 순간, 정말로 번개에 맞은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매서운 눈매였다. 카트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번개의 창. 그러나 카트리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의외로, 먼저 눈을 돌린 것은 그녀 쪽이었다. 다시 정면을 바라본 그녀는 왼쪽 편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멈춰 섰던 카트리도 다시 발을 움직였다. 옆을 바라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카트리 역시 정면만을 바라본 채 앞으로 직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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