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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카트제럴 판타지 AU 1-3.

블랙커피우유 2018. 6. 14. 15:39

*퇴고 안함/카트제럴 전제/장편 연재/내킬 때마다 올라옴/판타지 AU/설정은 적으면서 생각나는대로




비싸게 굴지 말고 나랑 놀자니까?”

왜 이러세요!”

 

뒷골목에서 유행하는 대사 넘버원을 창피한 기색도 없이 지껄이는 남자를, 여자는 몸을 떨면서도 경멸 가득한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남자는 여자의 반항적인 눈에서 눈물이 고이는 순간을 상상하며 얼굴가죽이 칠칠치 못하게 늘어날 뿐이었지만.

그런 상상이나 하고 있으니까, 남자는 자신이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이때 물러났다면 좋았을거늘.

남자가 양손을 벽에 짚고 그 사이에 가둔 여자에게 몸을 부비적대며 억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자에게 있어서는 행복한 순간이 찾아올 예정이었던 1초 전, 여자에게 겨우 행운이 돌아왔다.

 

으허억!?”

 

남자의 얼굴이 돌아가서는 안 될 방향으로 돌아간 것은 이참에 아무래도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남자의 몸 전체가 수면 위로 조약돌이 튕기듯이 몇 번이나 땅에 곤두박질치며 회전했으니까. 마지막으로 쓰레기통에 거꾸로 처박힌 남자는 힘없이 늘어졌지만 뒷골목에 나타난 히어로는 자비도 없는지 남자의 엉덩이에 쓰레기통 뚜껑을 덮어버렸다.

 

, 래트맨?”

 

여자의 기대에 찬 시선이 쓰레기통에 들어간 쓰레기에게서 뚜껑을 덮은 히어로에게 향했다. 그러나 히어로의 정체는 최근에 런던의 히어로로 알려지기 시작한 그가 아니었다.

 

이런, 히어로 네임을 안 정했네. 일단 고양이 가면이라고 불러주세요.”

 

코까지 덮는 고글 형태의 고양이 가면을 쓴 여성이 난감한 듯 볼을 긁적였다.

 

 

 

내 시계가 모나카로 변했잖아?!”

패트리! 어디 갔니, 패트리!”

으아앙, 내 래트맨 인형이 사라졌어!”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카트리는 생각을 포기하고 달렸다. 생각은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아니, 사실은 단순히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는 쪽에 가깝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웃기지도 않는 고양이 가면을 쓰고 하염없이 달리는 자신과 똑바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사정을 모르는 경비대의 누군가가 수상쩍은 인물로 간주하고 체포하려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시계는 저 사람이 바꿔치기한 거예요!”

패트리는 60퍼센트 확률로 저곳에 있습니다!”

래트맨 인형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 너의 곁을 떠났단다!”

 

범죄단이 나타났나 싶어 달려가면 대부분이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대다수는 카트리가 나설 일도 없이 금방 진정되었을 정도로.

카트리는 수수께끼의 히어로라는 설정으로 나타나서 사건을 잽싸게 해결하고 모습을 감추기를 반복했다. 범죄단의 짓인지만 확인하면 됐지만 카트리의 성격상 사건을 방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뻐근한 목을 흔들며 계속 걸어가는데 문득 가게의 창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고개를 돌렸다. 카트리는 사실, 고양이 가면 자체는 꽤 괜찮게 평가하고 있었다. 히어로가 된 기분으로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렇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문제는 제대로 된 변장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히어로 쇼 때 입을 옷을 구입하려던 카트리를 제지하며 구입한 옷으로는 누군가가 정체를 캐낼 위험이 있으니 따로 준비해주겠다는 말을 한 리들리 탓이다. 그리고 축제 마지막 날 당일, 카트리에게 주어진 것은 달랑 고양이 가면 하나뿐이다. 정신 차리고 보니 축제에 예산을 전부 쏟아부어버려 의상을 제작할 돈이 없었단다. 일은 가려가면서 받아야 했는데.

카트리는 많이 늦었지만 어딘가 옷가게에 들어가서 옷을 바꿔 입어야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체를 캐낼 위험이 있다고 막아놓고선, 평소의 복장에 가면만을 뒤집어쓴 성의 없는 변장으로 히어로 쇼를 시키다니. 사비로라도 구입해서 추가금을 뜯어내야지. 카트리는 일을 떠맡기고 간 위원장에게 옷값을 요구하기로 하고 근처에 옷가게가 있는지 둘러봤다.

 

꺄악! 도둑이야!”

 

범죄자들은 카트리에게 그럴 틈도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뭐야, 왕궁 사람인가? 한발 늦었구만. 다 해결 됐수다.”

가면을 쓴 마도사가 왔다갔지. 히어로 쇼라던데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니었고.”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알 수는 없을까요.”

그 밖에는 코트를 입고 있었지.”

 

제럴딘의 질문에 자기 할일에 착수하던 사람들이 시큰둥한 눈빛으로 돌아봤다. 그들 입장에서는 잘나신 왕궁 직속 마도사가 한참 늦게 등장해서 이것저것 캐물으니 못마땅할 만도 했다. 하지만 제럴딘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건의 낌새를 느끼고 달려와 보면 이미 해결되었단다. 이번으로만 10건은 넘었다. 자신을 제치고 간 것 만해도 열이 받는데, 가면이라느니 히어로 쇼라느니 우스꽝스러운 목격담이나 돌아다니고 있다.

그 정체가 수배지의 수배범은 아니리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범죄단의 수령이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

무슨 꿍꿍이지?

사실 제럴딘은 그 자의 정체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얻은 그 사람에 대한 힌트는 고작 네 가지. 가면, 히어로 쇼, 마도사, 코트. 가면이나 히어로 쇼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가 차는 정보였지만 나머지 두 가지.

코트를 입은 마도사. 듣자마자 제럴딘의 뇌리를 스쳐지나간 건, 베이지색 코트에 와인색 셔츠를 입은 지난번의 그 마도사다.

자신을 잠깐 동안이나마 앞서갈 수 있는 실력의, 코트를 입은 마도사. 그런 존재가 그리 흔할 리는 없다.

제럴딘답지 않은 추론이었으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냉정한 분석을 방해했다.

여행자 중에서는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마도사나 기사처럼 꾸미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럴딘은 그녀를 보자마자 한눈에 간파해냈다. 그녀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산들바람처럼 산뜻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빳빳한 코트 안의 각종 마도구와 포션. 빈틈투성이로 보이면서 빈틈이 없는 자세. 부드럽게 말린 머리와 온화한 인상에서도 엿보이는 굳건한 심지. 그녀와 마주친 아주 짧은 시간, 그녀에게 시간을 빼앗겼다. 더 이상 바라보면 그 시간은 무제한으로 늘어나, 제럴딘이 가진 것을 통째로 쥐어흔들지도 모른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어디선가 태풍이 불어와, 휩쓸고 지나가,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어버릴 듯한. 그래서 눈을 돌렸다. 눈을 피한 것이 아니라, 빼앗기지 않는 선택을 한 것이다.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리기 전에.

노을 녘에 물든 그녀는 마치 태풍의 눈처럼 느껴졌다. 그 고요함과 적막함이 가슴을 뛰게 했다.

제럴딘이 수배범이 아닌 그 자를 쫓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수배범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없는 현재로써는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히어로 쇼인지 뭔지를 하며 축제에서 벌어지는 소동의 중심에 있는 그녀와 수배범이 맞닥뜨릴 확률은 지극히 높다. 불에 나방이 뛰어들고 동네꼬마가 벌집을 쑤시듯이 겁도 없이 참견해대는 그녀가 수배범과 조우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럴딘은 자신의 경험상 범죄를 쫓는 전문가들보다 오지랖 넓고 어중간한 정의감을 품은 사람들이 먼저 위험한 범죄의 냄새를 맡고 맨홀 뚜껑을 열어 하수구로 뛰어든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하나같이 그 끝은 좋지 못했다. 사다리가 있는 하수구를 찾아 내려가는 전문가들과는 달리 그들은 사다리가 없는 입구를 찾아 겁도 없이 뛰어내리기 때문에 아마추어인 것이다.

무언가 범죄를 저지르는 수배범을 발견하면 이제까지 사소한 소동들을 잠재운 것처럼 서슴없이 나서겠지. 수배범도 자신의 계획이 들통 났다고 생각해 반격에 나설 테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

 

섣불리 승부의 판가름을 내려서는 안 된다. 판가름을 내린다쳐도, 언제 어떤 때라도 생각해야 하는 건 최악의 상황. 아까까지만 해도 그녀를 아마추어라고 여기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지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서 제럴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아무런 근거도 없잖아. 그런 직감은 믿으면 안 돼.

그녀의 실력도 수배범의 실력도 미지수.

그녀가 수배범에게 이길 경우.

수배범인걸 알고 제압한다면 경비대에 넘어갈 테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약 모른다면? 그녀에게 체포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혼쭐을 내고는 그냥 놓아주고 말겠지. 그녀에게 호되게 당한 범죄단의 수령이 다음엔 어떤 장소에서 출몰할지 예측하기 힘들어진다.

이것도 최악이긴 하네.

그녀가 수배범에게 질 경우.

무사히 끝나지는 않겠지. 인질로 잡히거나 목숨이 위태로워지거나

역시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제럴딘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이든 서둘러야 했다.

 

꺄악! 도둑이야!”

 

드디어 그 마도사보다 먼저 사건을 해결할 수 있겠군. 제럴딘은 상황에 맞지 않게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다른 것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생각해봤자 소용없는 문제에 얽매여있지 않아도 된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제럴딘은 주문 영창에 들어갔다. 왕궁 마도사다운 영창속도로, 도둑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마법을 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도둑에게는 다행인 일이 벌어졌다.

새까만 모습을 한 도둑이 제럴딘을 지나쳐 단숨에 달려 나가고, 제럴딘의 눈은 도둑을 쫓아, 이윽고 도둑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고양이 가면을 포착했다.

저번의 그 모습에 가면만이 덧씌워진 어설픈 변장이다.

카트리는 도둑을, 제럴딘은 카트리를 똑바로 보고 소리쳤다.

 

““거기서!””

 

좋은 소식이 있으면 안 좋은 소식도 있는 법. 곧이어 도둑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다. 화염마법으로 화상을 입는 위기에서는 벗어났으나 도둑이 자유를 만끽할 시간은 아주 약간 늘어난 것뿐이었다.

제럴딘은 영창을 중단하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도둑보다 느린 속도였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카트리가 마법을 쓸 것도 없이 도둑을 체술로 제압한 사이 제럴딘이 지체 없이 수갑을 꺼내들어 도둑의 손에 채웠다.

 

당신은…….”

 

도둑을 짓누르고 있던 카트리가 제럴딘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녀가 스쳐지나가던 순간의 기억이 밑에서 꿈틀거리는 도둑의 존재감을 옅어지게 했다. 그다지도 강렬했던 그녀와의 상호일방적인 첫 만남이.

그러나 카트리가 생각에 잠길 틈도 없이 한 번 더 수갑을 채우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카트리에게는 번개가 내리치는 소리로 들려왔다.

 

?!”

당신을 공무집행 방해죄로 체포하겠어.”

 

잠시 동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던 카트리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반박했다. 갑작스런 무게감에 도둑이 비명을 질렀으나 무시했다.

 

공무집행 방해요?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요?!”

당신이 이런 시시한 짓을 해준 덕분에 수사에 지장이 생겼어. 이게 방해가 아니면 뭐야?”

누구는 좋아서 한 줄 아세요?”

 

제럴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럼 누가 시켜서 했나 보군? 수사를 혼동시키기 위해 고용된 건가? 어찌됐든 당신은 얌전히 감방에 들어가 있어.”

죄송하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그리고 절 가두지 않는 게 좋을 걸요. 아마도 저와 당신의 목적은 같을 테니까요.”

같든 다르든 나 하나로 충분해. 당신의 힘은 빌리지 않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두 사람은 이게 처음 나누는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소개도 상황설명도 없이 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져갔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터놓고 얘기할 만한 화젯거리는 아닌지라, 둘은 일부러 애매한 말만 고르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리고, 상대의 말을 적절히 해석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서로가 상대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덕분이기도 했다.

이 좀도둑은 나중에 경비대가 알아서 하겠지.

제럴딘은 도둑은 방치한 채 카트리의 팔목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우고는 카트리를 쏘아봤다.

 

당신과 둘이라면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어?”

뭐야, 이러니저러니 당신도 혼자서는 불안한 구석이 있는 거죠?”

 

제럴딘은 한눈에 봐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수갑을 난폭하게 잡아끌었다.

 

잠깐, 이거 꽤 아프다구요! 오징어먹물 솜사탕 씨!”

남을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지 마!”

 

제럴딘이 자신이 잡아야하는 수배범이 범죄단의 수령이고, 어쩌면 그의 동료들까지 상대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임무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서다. 타겟이 한 명에서 집단으로. 위험부담이 확연하게 다르다.

준비가 필요하다고 느낀 제럴딘이 L국과 A국 사이에 있는 그들의 아지트를 습격할 계획을 짜던 찰나, 그들이 리버사이드 페스티벌 마지막 날에 L국에 잠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거기서, 제럴딘은 서류에는 적혀있지 않았던 시간제한을 알아차리고 애용하던 펜을 꺾어버렸다. 그들은 이미 L국으로 이동해오고 있을 테니 아지트로 가봤자 소용이 없는데, 축제의 마지막 날은 다가오고 있다. 아마도 제럴딘에게 내려진 극비임무는 축제 마지막 날을 무사히 넘기기 위한 것일 텐데 말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카트리와 마찬가지로 정보의 뒤까지 읽어낸 제럴딘이 이를 갈며 출입국관리장에서 감시를 했지만, 제럴딘도 사람인지라 24시간 감시를 하고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제럴딘은 넓디넓은 런던에서 얼굴 하나 아는 수배범을 찾아야하는 지경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일손이 부족했기에 일어난 사태였다.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도 불가능한 일이 있다. 그것을 실감하고 있는 차에 카트리의 저 말이다. 신경이 거슬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제럴딘이 분석한대로 라면 카트리의 실력은 방해가 되진 않을 터였으니. 그녀를 포획하기까지는 무척이나 성가시고 방해됐지만.

더군다나, 경비대 막사까지 그녀를 끌고 가는 사이 수배범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녀라면 감옥에 처넣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탈옥해서 눈앞에 나타날 것 같지 않은가. 유감스럽게도, 애시당초 제럴딘에게는 선택지가 하나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당신 때문에 시간을 많이 지체했어. 수사를 방해한 만큼 일 해줘야겠어.”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시는 군요. 더 의심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의심하길 바랬어? 미안하지만 난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 당신이 내가 쫓는 자의 동료일 가능성도 물론 있겠지만…….”

 

제럴딘이 카트리의 수갑을 풀고 앞서 걸어갔다.

 

당신의 지금 그 꼴은, 범죄자가 아니라 광대에 가깝지.”

 

준비도 없이 무대에 오른 광대 말이야.

카트리는 그 말에 조용히 가면을 벗어던졌다.

 

 

 

복작거리는 사람의 수만큼 즐거움이 넘쳐난다. 그렇게 생각한 카트리와는 달리 카트리의 옆에서 눈썹을 있는 힘껏 찌푸리고 있는 제럴딘은 사람들의 수만큼 소음이 넘쳐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야 특정인물을 수색하기는 힘이 든다는 말로 끝날 정도가 아니다.

그 후로도 자잘한 사건사고가 많았다. 카트리와 제럴딘은 매번같이 한걸음에 달려가 빠른 속도로 일을 해결했지만 수배범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옆 골목에서 퍼레이드라도 하는 모양인지 나팔소리와 함께 무식한 크기의 마스코트 인형의 모습이 머리 끝부분만 보여 왔지만 두 사람에게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두 사람이 열심히 눈을 굴리며 길거리에 좌르륵 늘어선 노점상을 지나가는데, 끝내 공복을 참지 못한 카트리의 배에서 한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갖 방향에서 달짝지근한 냄새가 풍겼다. 이 안에서 범죄의 냄새를 맡으라니 카트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트리가 아랫배를 움켜쥐고 옆을 힐끔 보자 제럴딘의 냉랭한 눈초리가 돌아왔다.

 

우리 뭔가 먹고 하지 않을래요?”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아?”

템즈강도 식후경이라잖아요. 뭘 먹어야 머리도 돌아가죠.”

 

제럴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카트리는 매의 눈으로 노점상의 음식들을 체크하며 우선순위를 매겼다. 범죄단을 찾을 때보다 열의가 담긴 눈빛에 천하의 제럴딘도 할 말을 잃고 한숨만 쉬었다.

 

어라?”

음식에 벌레라도 발견했나 보지? 상황 구분 못하고 걱정 없이 음식을 쪼아 먹는 점에서는 당신과 동류니까 신경 쓸 거 없어.”

 

열중해서 길거리 음식들을 쳐다보던 카트리의 시야 한구석에 이국의 향기를 시각으로 나타낸 듯한 의상이 눈에 비쳤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드레스에 목에 둘러진 채 박음질된 스카프, 소매 끝의 프릴…….

가시 돋친 제럴딘의 말을 못들은 체한 카트리는 얼마 전까지 질리도록 보아왔던 옷차림을 보고 거침없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축제는 즐기고 계신가요? A국의 축제와는 많이 다르죠?”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은 A국의 전통의상이었다. 아스란트에서는 모든 의류가 커다란 천으로 널널하게 만들어져 알기가 쉬웠다.

제럴딘이 딴 길로 새는 카트리를 비난하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카트리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내가 당신네들의 보잘것없는 잔치를 보러 왔겠어요? 난 우리나라의 유물을 보러 온 거예요. 런던이 뺏어간 아스란트의 보물을.”

 

카트리가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먼 치에서 카트리를 놓고 갈지 망설이던 제럴딘이 완전히 멈춰 서서 둘을 지켜봤다.

 

던전에서 발견된 보물의 소유권은 던전을 클리어한 사람에게 있어요. 던전이 어느 영토에 있든지 간에요.”

, 그 잘난 대모험가 양반 덕에 L국이 거의 모든 보물을 독차지 하고 있으면서 잘도 말하는군요?”

모든 보물을요? 농담도 참! 아스란트의 보물은 던전 따위에 묻히지 않고 아직도 건재한 걸로 아는데요. 당신들의 빼어난 기술이 만들어내는 마도구는 던전의 보물보다 값어치 있다고 생각해요. 틀린가요?”

……흠흠, 그래서 '거의' 라는 말을 붙였잖아요. L국의 모든 보물을 합쳐도 A국의 상대는 안 되지.”

아스란트의 마도구는 저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어요. 분명 옛날 아스란트인들이 만든 고대의 마도구와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겠죠. 그들의 기술이 그대로 이어져와, 거기서 더 발전했을 테니까요. 개인적으로 아주 흥미가 있어요.”

 

카트리가 지그시 바라보자 기분이 좋아진 여성이 볼을 매만지며 미소를 보였다. 이제까지 철가면이라도 뒤집어쓴 듯이 매몰찼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변화였다.

 

당신, 런던 사람치고는 안목이 있네요. 그렇게 관심이 있다면……, 당신도 전시회에 가나요?”

, 물론. 그곳에서도 부인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보죠.”

 

이제는 A국의 보물이 아닌 카트리에게 관심이 생긴듯한 여성이 대화를 이어가고자 넌지시 화제를 던졌지만, 카트리는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상쾌하게 대화를 끝내버렸다. 뒤에서 아쉬운 듯이 쳐다보는 여성의 시선을 모른 체하고, 앞서 가던 제럴딘 곁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선 카트리가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가장 노릴 것이 많은 곳이긴 하지.”

돈 냄새가 풀풀 나는 장소니까요.”

 

두 사람의 말이 가리키는 장소는 마을의 중심에 있는 박물관이었다. 여성이 말했던 전시회가 열리는 장소다. 대모험가 허셜 레이튼은 물욕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전 세계의 던전을 탐험하다보면 원치 않아도 귀한 보물이 수도 없이 손에 들어왔다. 그는 금전적인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모조리 나라에 기부했다.

매년 축제날에만 특별히 전시를 하기 때문에 많은 타지사람들이 전시회를 목적으로 런던에 찾아왔다.

 

그나저나 당신, 정말 입을 잘 놀리는군.”

맛있는 걸 잔뜩 맛본 입이라서요. 그만큼 일을 하죠. 음식의 중요성을 아시겠죠?”

 

제럴딘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그 밉살맞은 입은 언제 다물어? 쫄쫄 굶겨야 하나?”

, 맛있는 걸 먹을 때요?”

 

제럴딘은 행상인에게 양배추를 하나 사서 카트리의 손에 들려주었다. 멀리서 가격이 적힌 표지판을 확인하고 정확히 가격대로 동전을 꺼내, 행상인을 지나칠 때 돈을 내려놓고 아무 양배추나 집어 올려 카트리에게 패스한 것이다.

카트리가 양배추를 한 잎 뜯어 먹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맛있게 조리를 해주셔야죠.”

편식하지 마.”

 

 

 

런던의 박물관은 고대의 신전을 그대로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신을 향한 모독인 듯 하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신의 선물이라고 떠드니 인간이란 참 이기적인 존재다.

중앙 홀에서부터 4개의 관으로 나누어진 각 관에는 던전의 위치와 보물의 가치별로 유물이 흩어져있었다. 높은 천장 아래로는 가고일의 석상 등이 벽에 걸려있다. 티켓을 소지하지 않은 자가 관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가고일의 창에 몸이 꿰뚫리거나 가고일이 뿜은 불꽃에 순식간에 타죽을 것이다.

왕궁 마도사인 제럴딘의 프리패스를 이용해 줄을 무시하고 박물관에 들어온 두 사람이 주변을 살피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경비가 한산하다. 왕실호위대는 왕궁, 왕실기사단은 출입국경비장, 경비대는 순찰. 즉 최저한의 인력만이 박물관을 지키고 있었다.

 

이건……. 심하네요. 여기가 제일 엄중히 관리되어야 할 곳인데.”

본래는 이렇지 않아.”

알아요. 제가 아는 한 이곳의 경비가 가장 삼엄했는걸요. 특히나 축제기간은요.”

 

가고일의 석상이 잡아내는 건 티켓을 소지하지 않은 사람뿐이다. 박물관의 티켓은 신분이 확실한 자에게만 판매하지만 암거래상이 판을 치니 그리 믿을 게 못됐다.

카트리와 제럴딘은 특별한 말도 나누지 않고 경비들의 위치를 확인하며 박물관을 돌았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둘의 얼굴에는 서서히 그림자가 졌다.

범죄단의 노림수가 박물관이라면 훌륭하게 그 손에 놀아나 경비에 구멍이 나버린 것이고, 노림수가 박물관이 아니어도, 이곳을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범죄의 표적이 되기 딱 좋았다.

제럴딘은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정신도 같이 갈려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앞이 막막했다. 그러나 이내 카트리와 눈이 마주치자, 둘이기에 가능한 한 가지 방안이 떠올랐다.

 

둘로 나뉘자. 한사람은 범죄단을 찾고 한사람은 여기를 지키는 게 좋겠어.”

그건 동감인데요, 정보 교환도 필요할 테니 1시간 간격으로 만나면서 역할도 교대하는 건 어때요?”

 

넓은 런던에서 1시간은 너무 짧은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교통수단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제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당신이 일단 여기에 남아. 1시간 후에 다시 올게.”

 

비교적 조용한 박물관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기분도 들었지만 제럴딘은 자신이 생각에 잠기면 몸도 무거워진다는 자각이 있었기에 중앙 홀 방면으로 몸을 돌렸다. 지금은 행동력이 중요하다.

 

아참, 오징어먹물 솜사탕 씨.”

 

제럴딘이 질린 표정으로 뒤돌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을 음식으로 만들지는 말지?”

아뇨, 배가 고픈 건 사실이지만……. 그냥 코드네임처럼 불러봤는데요.”

그런 코드네임은 사절이야.”

이름을 모르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제럴딘은 카트리와 손을 잡기는 했으나 자기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협력이라기보다는 이용. 사실 이용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름이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이름이 필요할 상황도 있긴 있을 테니까.

제럴딘이 생판 모르는 남에게 왕궁 마도사인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에 대한 리스크를 생각하고 있는 사이, 카트리는 꽤나 거리가 벌어진 제럴딘에게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벽에 걸린 그림을 옆에 두고 섰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검을 들어 올린 검사의 그림이었다. 별을 향해 치켜든 검 끝이 별빛과 하나가 되어 반짝거렸다.

 

카트리에일 레이튼이에요. 카트리라고 불러주세요.”

 

레이튼. 익숙한 이름에 무심코 그 얼굴을 뜯어보았지만 카트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제럴딘도 질 세랴 카트리에게 한걸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이쪽도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그림을 옆에 두고 섰다.

거대한 달을 배경으로 두 팔을 벌린 마법사의 그림이었다. 마법사가 허공에 그린 마법진이 달과 완벽히 겹쳐져 은은하게 빛났다.

 

제럴딘 로이어야. 이름으로 불러.”

 

둘은 새삼스러운 느낌에 괜히 자신의 옆에 있는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밖에서는 어느덧 해가 지고 있지만, 스쳐지나갔다고 하기에는 멀었던 그때보다는 가까운 거리감이었다.

 

이름을 알고 있는데 오징어 먹물이라고는 안 불러요.”

솜사탕은 어디 간 거야?”

 

좋은 요소가 하나도 남지 않은 별명에 제럴딘이 무심결에 되묻자, 카트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제 안으로요.”

별 걸 다 먹어치우는군.”

 

기분이 좀 달달해졌거든요. 그렇게 이유를 설명하면 또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논할 테니, 카트리는 제럴딘의 소원대로 입을 다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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