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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없음/카트제럴 전제/장편 연재/내킬 때마다 올라옴/판타지 AU



0-2.

외벽 너머로는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강 건너편에서는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려온다. 성 내부에서는 별난 마법사들이 연구를 진행하며 수상쩍은 주문을 외우는 한창일 테다.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높이 솟은 탑에 걸린 깃발이 바람에 너울거리는 모습이 보이겠지. 확인해보면 생각과는 다를지도 모르나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이다. 직업상 주변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나 슬슬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넌덜머리가 나기 시작한 그녀는 보잘것없는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반들거리는 대리석 바닥을 말끔한 부츠가 망설임 없이 밟고 지나갔다. 부츠 주인의 성격을 나타내듯 깔끔한 신발 밑창은 희미한 발자국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발걸음이 멈춘다. 엄격한 낯짝의 경비대원에게 통행증을 건네주기 위해서다.

항상 보는 얼굴이어도 왕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만큼 예외는 없다. 경비대원은 통행증을 가볍게 쓸어보고는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제럴딘 로이어. L국 왕궁직속 마도원의 이름 높은 엘리트 마도사. 그녀를 사칭할 용기 있는 자는 없으리라.

통행증을 받아든 제럴딘은 나무문에 손을 가져다댄 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나 입궁절차가 이루어지고 있을 참이었다. 곧이어 무거워 보이는 문이 저절로 열렸다. 말할 것도 없지만 제럴딘이 문을 통과하자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절로 닫혔다. 제럴딘은 이 귀찮은 절차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무척이나 허술하다고 느꼈다. 제럴딘이 마음만 먹으면 이런 허가 없이도 뜻대로 성 안과 밖을 들락거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접한 떨거지들을 막기에는 좋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마법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애매한 마법은 침입자에게 역으로 이용되기 딱 좋았다. 그렇다고 그걸 지적해서 성문의 마법을 강화하는 역할을 떠맡게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럴딘정도 되는 마도사는 누구나가 이 애물단지 문을 모르는 척했다.

차라리 이쪽 입구를 없애고 마도사들도 도개교 쪽의 성문을 이용하면 편할 것을. 제럴딘은 성내를 막힘없이 걸으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이 소속된 장소의 단점을 하나부터 열까지 거론하며 갑갑함을 느꼈다. 마도사들이 성으로 출입하는 장소는 성의 후문 측, 지하도로 향하는 입구와 나란히 붙어있었다. 부려먹기는 엄청 부려먹고 대외적으로는 왕궁 마도사의 이미지를 철저히 이용하는 주제에 실질적인 대우는 이 꼴이다. 뒤에서 마도사들이 욕하는 건 아는지 몰라.

그렇다고 마도사들만이 드나드는 비밀스러운 출입구를 꽁꽁 숨겨놓은 것도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야외인데도 불구하고 대리석 바닥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쓸데없이 눈에 띈다. 투명화 마법조차도 걸지 않아 주변과의 부조화 탓에 더욱더 이목을 끌고 있다. 듣기로는 이런 해괴한 디자인이 된 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데 제럴딘이 납득할 만한 이유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았다.

로이어 씨, 오셨군요.”

아스푸아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할 쯤이 되어서는 허공을 찌르듯 사나운 눈매가 된 제럴딘을 공상의 세계에서 불러들인 건 제럴딘과 같은 마도원 소속의 마도사인 로이 콘래드였다. 그는 눈을 보호하기 위한 마도구-이름은 선글라스라고 했다-를 이마 위로 걸치고 마도원의 제복을 추레하게 입고 있었다. 마법 연구를 하는 도중에 빠져나온 듯한 몰골이었다. 제럴딘과 로이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스푸아로는?”

다른 일로 바빠서 제가 대신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둘이서만 마주하는 일은 처음이군요.”

멋쩍은 듯이 뒤통수를 긁적인 로이가 손에 들고 있던 용지를 제럴딘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이번에 부탁할 일이랍니다.”

본래라면 그와 헤어지고 혼자서 내용을 확인해봐야겠지만 아스푸아로가 자리를 비웠다면 만약 일에 의문점이 생겼을 때 상담해야할 상대는 로이였다. 아스푸아로가 부탁했다면 일의 내용도 파악하고 있을 테니 구태여 숨길 필요는 없다.

그러나 로이를 힐끗 보고는 그 자리에서 용지를 펼쳐든 제럴딘은 그 생각을 바로 접어야 했다. 펼쳐들자마자 접어버린 종이처럼. 눈앞에서 의아한 듯이 바라보는 로이가 이 일거리에 대해 아는 게 있기는 할까. 이 종이의 재질이나 알고 있겠지. 극비임무라고 적힌 서류를 이렇게 대충 넘겨줘놓고는 저 태연자약한 얼굴이란.

뭔가 문제라도?”

아뇨.”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려 무의식적으로 올라간 손이 자연스럽게 안경을 올렸다. 제럴딘은 봉투조차 없이 접힌 서류뭉치를 끌어안고 몸을 틀었다.

이만 실례하도록 하죠.”

짧은 말을 남기고 돌아선 제럴딘은 로이의 인사도 받지 않고 떠나갔다. 그녀는 발자국은 물론 발소리조차 남기지 않기에 복도에는 금세 정적이 찾아왔다.

 

 

왕궁 마도사는 모두 마도원이라는 마도사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왕궁 마도사는 즉 마도원. 제럴딘은 말만 번지르르하지, 마법을 쓸 수 있는 국가전력을 세련되게 말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국왕은 그런 왕궁 마도사 중에서도 특히나 실력이 뛰어난 자들을 엄선해 임무를 부여한다. 마도원 안에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특수한 집단이 또 하나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마도원의 마도사에게 한정된 일은 아니었다. 제럴딘과 같은 처지인 아스푸아로 또한 국왕에게 받는 임무를 처리하는 중간관리직이지만 마도사는 아니다. 그와 같은 왕실호위대나 경비대 중에서도 제럴딘 같은 자들이 있었다.

제럴딘은 그런 자들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장소의 문을 두들겼다. 아까 전의 나무문은 아니다. 성 내부에서 시크릿 존이라 불리는 곳이다. 주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임무내용을 확인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었다. 좁은 공간의 밀실로 된, 수 십 개의 방중에 빈방에 들어가는 것이 원칙. 방이 워낙 많다보니 일일이 마법을 걸지는 못해 빈방을 확인하는 방식은 고전적이게도 노크였지만.

빈방을 찾아들어간 제럴딘은 마력이 빨려나가면서 약간의 피로함과 불쾌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시크릿 존의 이용료로 성의 결계석을 유지하는 마력을 제공하는 과정이었다. 마력이야 일정시간이 지나면 회복하지만 이제부터 임무를 수행할 몸인데 완전한 몸 상태가 아니게 된다는 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애용하지는 않는 장소였다. 이번에도 극비임무만 아니었다면 사용할 일은 없었을 텐데. 위험한 일을 앞두고 마력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혀를 찬 제럴딘이 다시금 서류를 펼쳐들었다.

서류의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명수배범을 체포하라는 단순명쾌한 내용이었으나 문제는 서류에 명기된, 지명수배범을 잡아달라고 국왕 폐하께 서찰을 보냈다는 사람이다.

“A국의 국왕?”

제럴딘은 자신이 잘못본 건 아닌지 종이를 가까이에 끌어당겨 이리보고 저리보는 그녀답지 않은 행동까지 했으나 그런다고 내용이 바뀌지는 않았다.

극비임무답게 국가단위의 스케일. 중요한 일인 게 분명한데도 적힌 내용은 간결했다. 필요 이상으로 알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실패하면 끝이겠군. 제럴딘은 일개 수배범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틀어질 위기를 직면하고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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